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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Aug 17. 2022

헤어질 결심

#66. movie sketch




염세주의자가 만든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몇 안 되는 15세 관람가입니다. 실제로 필모그래피 중에서 청소년 관람불가가 아닌 작품은 <공동 경비 구역 JSA>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헤어질 결심> 뿐일 정도로, 그의 이전 영화는 강렬한 노출 장면이나, 잔인하고 극단적인 묘사가 화제였습니다. 일반 관객이 다가가기 쉬운 영화는 아니었죠. 이전 작품들 중 관람 연령이 가장 낮은 건 2006년 작인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입니다. 복수 3부작을 성공시킨 감독이 좋은 조건에서 만든 로맨스 영화였습니다. 제한 연령도 낮고 당시 주가가 높았던 비와 임수정을 주연으로 내세웠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내용이 관객에게 살인보다 더한 불편함을 준듯했죠. 흥행이라는 장애물 없이 날 것의 박찬욱 월드가 열린 작품이었거든요. 훗날 감독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각본집 서문에 ‘가끔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정의는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흥행 실패로 날것의 박찬욱 월드는 관객과 더욱 멀어졌습니다.

제작에 들어가는 자본이 큰 영화는 작품의 완성도로만 평가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물을 냈다 해도 흥행에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은 거장반열에 들어서기 전부터 공공연히 '관객에게는 만족을, 투자자에게는 기쁨을'이라는 신조를 내세워왔습니다. 새 작품의 흥행이 부진하면 다음 영화에서는 어떻게든 대중성을 되찾으려 노력했죠. 그는 결코 관객을 등지는 연출가는 아닙니다. 취향이나 생각이 독특할 뿐이죠. 하지만 감정을 뜨겁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박찬욱의 건조하고 에두르는 방식이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부터 어려운 내용일 거라 오해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지금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아웃사이더의 향을 내죠.


박찬욱 감독은 대중성을 얻기 위해 매 작품마다 관객에게 성실히 다가갑니다. 한 작품에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부분과 매니악한 요소를 넣어 함께 전달하고, 관객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화려한 액션이나 미장센 같이 자극적인 요소도 잊지 않습니다. 배운 변태라고 불릴 정도로 취향이 독특하다 보니 자기 세계를 유지하면서 대중을 설득하기 쉽지 않을 텐데, 여전히 개인의 연출 욕망과 대중성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의 영화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때깔만 좋다느니 알고 보면 별거 아닌 감독이라느니 이상한 평가절하도 많고요. 저는 박찬욱 감독을 따라다니는 오명의 원인이 제작 의도와는 다르게 영화의 자극적인 부분만 소비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팬심으로 이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장면 없이 온전히 그의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가 나오길 바랐어요. 그리고 <헤어질 결심>은 드디어 잡음 없이 감독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은 그의 작품이 생각보다 낭만적이라는 걸 알 겁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는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경찰에게 쫓기고 있지만 살해당한 여자 친구의 손을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경찰들과 한 엘리베이터에 탑니다. <박쥐>에서 신부였던 상현은 태주의 거짓말에 속아 친구를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그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하죠. 박찬욱 감독은 모두가 아는 내용을 어떻게든 새롭게 표현하고 싶어 합니다. 정신병원 생활을 판타지 로맨스로 표현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처럼요. 사실 이 영화에서 예쁜 임수정이 연기하는 영군은 오랫동안 정신병을 고치지 못해 몸과 마음의 상처가 심한 사람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죠. 박찬욱 감독은 작품 속 주인공의 현실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가공해서 전달합니다. 창작자로서 자기 방식을 지키기 위한 그만의 방법인 거 같아요. 그래야만 제약이 줄어들고 불편한 이야기는 숨길 수 있거든요. 이야기를 잘 전하기 위해서는 가공이 필요합니다.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 선남선녀인 이유도 그 때문이죠. 그는 약간의 환상이 필요한 지점을 영리하게 활용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연출가입니다. 그 수고가 관객에게 전해지면 가공한 이야기는 책임감 없는 다큐멘터리보다도 진실하게 느껴지죠.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영화가, 어느 순간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잘 아는 감정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제대로 발휘된 영화입니다. 감독은 원색적인 불륜 이야기에 개연성을 만들기 위해 인물의 과거를 만들고, 상황을 짠 후에,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방점을 찍었습니다. 영화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반하는 상황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남편의 죽음과 취조라는 불편한 상황에서도 두 주인공은 첫 만남에 서로 호감을 느껴야 하죠. 관객이 그 상황을 빨리 납득하려면 박해일이나 탕웨이처럼 호불호가 없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유리했을 겁니다. 두 배우는 미디어 노출빈도가 낮아 신비롭고, 목소리나 외모, 연기력등 인물 전체 호감도가 무척 높습니다. 매력적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불륜이라는 거부감이 큰 장벽을 쉽게 뛰어넘어 관객에게 다가갑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이 어른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른이란 표현은 책임질 일이 많고, 일정 기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을 뜻하는 거 같습니다. 희망만 누리기엔 지쳐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사람. 딱 잘라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어른인지도 모르죠. 영화는 누군가의 생각을 그림으로 펼쳐내는 일이라, 결국엔 감독이 자기 삶에서 직접 느낀 감정을 관객과 공유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심정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봐 달라'는 말로 느껴졌습니다. 주인공 서래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혹은 "참 불쌍한 여자구나..."라는 대사처럼, 관객이 인물의 심정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게 영화의 목표인 거 같습니다. 불륜을 미화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사건보다는 상황과 그 사람이 살아온 삶으로 판단해 달라는 거죠.

주인공인 해준은 부인과 관계가 나쁘지 않습니다. 오래된 여느 부부들처럼 조금 권태로울 뿐이죠. 서래를 보고 이유 없는 끌림을 느낀 건 부인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이혼하거나 가정을 떠나고 싶어서도 아닐 겁니다. 그냥 서래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 순수한 호감입니다. 취조실에서 초밥을 먹고 테이블을 함께 정리하는 장면이나, 해준의 집에서 사건 파일을 보며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관객도 무의식 중에 두 사람이 끌리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반지를 낀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지만 이해는 갑니다. 저런 상황이라면 나라도 마음이 흔들리겠다 싶은 거죠.


<헤어질 결심>은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두 주인공은 성별과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오해하지만, 그래서 더 순수하게 상대를 이해합니다. 경찰서에서 함께 일하는 해준과 직원들은 각자 서울말과 지방어를 씁니다. 서래가 돌보는 할머니의 시간은 젊은 그들보다 훨씬 천천히 흐르죠. 코미디언 김신영의 등장은 연기력을 떠나 캐스팅만으로도 영화의 주제와 잘 맞아 보입니다. <헤어질 결심>은 잘 몰랐던 누군가를 이해하는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을 고전 수사물로 기획했다고 합니다. 고전 수사물에서 정직한 형사는 미모가 출중한 묘령의 여인에게 마음이 흔들려 수사에 혼선을 빚지만, 결국엔 권선징악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장르 법칙을 따르죠. <헤어질 결심>은 장르 영화 공식을 따르는 스토리뿐만 아니라 양식적인 촬영과 편집으로 관객을 관조하게 만듭니다. 이야기에 현실을 가져와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는 거죠. '괜찮아 그냥 즐겨, 어차피 이야기일 뿐이야'라고요. 하지만 멜로로 두 인물의 감정을 전할 때는 관객을 이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예를 들면 서래 집을 염탐하는 해준을 pov로 찍은 것처럼요. 해준의 시점으로 서래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야가 좁아지는 과정이란 걸 한 번에 보여줍니다. <헤어질 결심>은 한 가지 이야기를 사건과 감정, 고전 형사물과 멜로처럼 두 갈래로 나누어 입체적으로 전달하려 합니다.

사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준은 웃고 있는 서래의 뒷모습을 보고 드디어 운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해준이 자기 마음대로 서래에게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를 씌우며 마음을 빼앗기자, 서래는 필요에 의해 해준의 호감을 받아들였습니다. 서래의 환영이 실제와 다르다는 걸 깨닫고 해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떠나자, 서래 안에는 새로운 해준의 환영이 생겨났습니다. 서래가 해준의 고백을 녹음한 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른 그의 행동으로 녹음 파일은 그녀에게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엔 내 눈에 비친 모습으로 상대를 바라봤지만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서 박찬욱 감독은 불륜이라는 논란의 소재를 '헤어질 결심'이라는 단어로 정리합니다. ‘헤어질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때 그렇게 매력적인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저 문장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죠. 끊임없는 불륜 논쟁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랑이라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하지만 관객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대중성의 공식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 마지막 장면에서는 다시 장르물로 돌아와 흠결 있는 인물에게 권선징악을 실현합니다. 서래가 스스로 벌을 내렸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고 망망대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해준을 처량하게 느낍니다. 논란을 영리하게 처리한 감독 덕분에 아무도 화내지 않고 어른의 복잡한 사정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죠.

<헤어질 결심>은 끝을 알면서도 어떤 상황에 빠지고, 그곳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서래는 자기는 인내심이 부족해 산보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바다는 지혜를, 산은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하죠. 서래의 집 벽을 가득 채운 푸른 벽지는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고 산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서래의 삶에는 아픔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모든 걸 똑바로 바라보려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해준은 바다 같고 산 같은 서래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의 잘못을 이해하게 돼버렸죠.


험난한 산봉우리가 모여 잔잔한 바다 물결을 이루듯 <헤어질 결심>은 여러 봉우리가 모여 큰 그림을 만들어냅니다. 여전히 예쁜 걸 좋아하는 감독의 취향도 제대로 담겨있고요. 이 영화에는 박찬욱 감독의 그 장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관객에게 이야기를 설득해야 했거든요. 한국 사회에 특히 예민한 불륜을 소재로 환영받지 못할 자기의 고유한 생각을 실었지만 꼼꼼한 연출로 논란의 불씨를 전부 꺼버립니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 영화가 불륜을 미화한다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마치 서래를 마주한 해준의 심정과 비슷하거든요. 영화가 마음에 안 들면 피하는 방법은 보지 않는 것뿐입니다. 관람하고 나면 이미 늦어요. 심지어 한 번으론 부족하죠. 개봉 시기 대전운이 좋지 않았던 <헤어질 결심>은 아슬아슬하게 고전하다가 관객들의 입소문과 N차 관람으로 얼마 전 손익분기점을 넘었습니다. 감독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각본집 서문에 남긴 문장처럼 그의 세상을 지지해 준 관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여러분이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에 알았어요. N차 관람한다고 했을 때. 한 번은 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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