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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May 31. 2018

미야자키 할아버지의 지브리 월드

#01. movie sketch


경제적이지 않은
지브리를 응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애들이나 보는 만화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야오가 '만화'를 만드는 감독이긴 하지만 저는 일반적으로 미야자키 감독 앞에 붙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이라는 수식조차도 그의 작품을 깎아내리는 표현 같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사를 사용하지 않을 뿐 굉장히 깊이 있고 일관된 세계관을 지닌 영화감독입니다. 그 증거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는 최초로 금사자상(명작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거장에게 수여되는 상)을 수상했고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최우수상인 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분명 심사과정에서 '그래도 애니메이션인데'라는 인식이 없지 않았을 텐데 그런 핸디캡을 지니고도 일반 영화들 사이에서 수상한 겁니다. 그런 인식이 없었더라면 거의 매번 수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의 작품 세계에 드러나는 주된 키워드는 '소년과 소녀', '반전', '자연파괴', '인간의 욕망', '유년시절의 추억' , '아이와 어른', '공생', '물질만능주의'등입니다. 하야오의 작품 중 소년과 소녀가 나오지 않은 영화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어리지만 주위의 극적인 환경 때문에 (주로 전쟁) 애틋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저절로 로맨스를 만들어 냅니다. ex) <천공의 성 라퓨타>, <모모노케 히메>의 두 주인공들.



<벼랑 위의 포뇨>



작품 속 여자 주인공들은 '밝고 씩씩해 누구나 사랑하는 캔디형' + '잘못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잔다르크형'을 기본으로 조합과 비율을 조금씩 바꾸어 나갑니다. ex) 캔디 비율이 높아지면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공주가 되고 잔다르크 형이 높아지면 <나우시카>나 <원령공주>의 인물이 됩니다. 여자 캐릭터들이 영화 속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게 하야오 작품의 주된 틀인데, 그게 가능한 이유는 그녀들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순수한 소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오무들과 화해를 이끌어 내는 나우시카,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숲을 지키려는 모모노케 히메, 돼지로 변한 부모님과 저주받은 하울을 구하고 마녀 유바바마저 회심하게 만드는 센이 그렇습니다. 



<모모노케 히메>



개인적으로 하야오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모모노케 히메>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 목록 중 가장 이미지가 강렬한 영화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오만함과 이기적인 욕심을 죽어가는 재앙 신으로 표현했어요. 재앙 신이란 한때는 인간보다 뛰어났던 숲 속의 신들입니다. 그들이 인간을 향한 증오를 참지 못 하고 세상에 저주를 쏟아내며 죽어가는 겁니다. 총에 맞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과 재앙에 파묻혀 죽어가는 숲 속 신들의 모습은 영화 등급을 다시 확인하게 할 정도로 잔인합니다. 



<모모노케 히메>



하지만 그 잔인함이 <모노노케 히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잔인함으로 장르성을 획득한다는 게 아니라 끔찍한 묘사가 필요한 때도 있다는 겁니다. 영화 끝자락에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왕이 내릴 포상에 눈이 멀어 기어이 사슴 신의 머리를 베고 맙니다. 기괴한 장면이지만 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끔찍한 묘사가 없었더라면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서사가 매우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필요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이 '그 영화 주제가 뭐야?'라고 물어오면 하야오의 작품은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의 토토로>의 주제를 찾아보자면 '현대 사회의 순수 소외' 정도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쁘거나 아픈 부모로 인해 소외당하는 아이들, (사실상 극 중 메이는 토토로가 없었다면 하루 종일 혼자 놀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혼자 사는 노인의 이야기, 본의 아니게 가장을 도맡게 된 아이의 상황, 더 이상 신비함을 믿지 않는 어른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단순한 주제를 넓게 퍼트립니다. 그리고 이런 디테일을 살리는 방법은 소설처럼 묘사도 아니고 연극이나 드라마처럼 대사도 아닌 영상과 상황입니다. 서사를 간결히 하는 대신 화면으로 이야기보다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영화적'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오무 무리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분노로 가득 차 폭주하는 오무들을 막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거죠. 이 장면은 별다른 대사와 설명 없이 상황과 이미지 만으로 그녀의 비장한 마음을 표현해 냈습니다. 강렬한 이미지가 감정을 극대화해 전달하는 거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일본의 기타노 타케시 감독은 자신의 연출 철학 중 하나가 작품 속 어떤 장면을 집어도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 그림이라는 게 단순히 '예쁜 장면'을 뜻하는 건 아닐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캐릭터가 그곳에 서서 하는 행동이 곧 작품의 주제이자 이야기가 됩니다. 사소한 이야기도, 커다란 담론도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 그림 같은 장면들 때문일 겁니다. 



<벼랑 위의 포뇨>



<벼랑 위의 포뇨>에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표정과 행동이 섬세하게 드러납니다. 아이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구체적인 표현이 있어요. 이렇게 넓으면서도 깊은 미야자키 월드의 작품들은 마치 소설 <어린 왕자> 같은 매력이 있습니다. 내 경험이 늘어면서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게 되고 나이에 따라 다른 공감과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은퇴를 여러 번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2020년 연령상 정말로 마지막 작품이 될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함께할 사람을 모집하는 채용공고에 응모가 쇄도했다고 해요. 3D가 범람하는 요즘 지브리의 방식은 결코 경제적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예전만큼 훌륭한 작품을 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프로그램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대에도 미야자키의 작품만큼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감성은 인간의 노력으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라고 믿습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을 고집하는 지브리의 방식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영화 그리고 그 제작에 동참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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