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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un 01. 2018

Godfather : 대부 3부작

#02. movie sketch


명작과 명배우는 
시대를 타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시대를 타지 않고 어느 때에 보아도 촌스럽지 않습니다. 굳이 저까지 거들지 않아도 대부가 좋은 영화라는 건 전 세계가 알지만 (가장 위대한 영화, 죽기 전에 봐야 하는 영화, 무슨 지에서 선정한 영화 1위 등등) 온 세계가 극찬을 하는데 저라고 하지 말라는 법 있나 싶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972년 작인 <대부>는 지금 보아도 무결점의 영화입니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이탈리아 시실리 가문의 가족 이야기이고 남성 위주
이며 특정 시대의 특수한 계급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가족과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세대를 어우르는 힘이 있습니다. <대부>는 오프닝에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부 비토 꼴리오네(말론 브란도)에게는 그 나름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의 정의는 가족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입니다. 여기서 가족이란 혈연관계만이 아니라 그에게 상납하고 의지하는 모든 '친구'들을 뜻하죠.



<대부>



<대부>의 첫 장면에서 한 남자는 비토 꼴리오네에게 청부살인을 요청합니다. 그는 미국에 건너와 성공을 거두고 자식들 역시 미국인으로 키운 전형적인 아메리칸드림의 수혜자였지만, 딸이 미국 경찰관의 성추행에 저항하다가 폭행을 당하고 처참한 몰골로 살아남자 대부를 찾아옵니다. 그는 법을 믿었지만 미국은 경찰관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줍니다. 비토 꼴리오네는 묻습니다. '왜 나에게 먼저 찾아오지 않았냐, 이 정의의 나라가 언제까지고 당신을 지켜줄 줄 알았나?' 남자는 흥분해서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그들을 죽여달고 합니다. 자신은 정의를 요청하는 거라고요. 대부는 말합니다. '그건 정의가 아니야, 당신의 딸은 살아있어.'


그에게는 확고한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청부살인을 부탁하는 남자가 손등에 키스를 하고 그를 Godfather라고 칭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경찰들은 친구의 딸을 폭행했으니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 되는 거죠. 이게 대부의 정의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살인을 업으로 삼는
 마피아라고 불리더라도 그의 패밀리에게 이로우면 그걸로 된 겁니다. 정의는 공평으로 이뤄지고 사랑은 편애에서 시작되기에 철저하게 배타적인 비토 꼴레오네를 가족들은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마피아지만 너무도 화목하고 서로를 아끼는 가족이었어요. 이 정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걸 추구하는 미국인들과는 달랐죠. 비토 꼴리오네는 패밀리를 잘 간수하는 것만이 진정한 남자다움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고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게 곧 정의라고 생각한 겁니다. <대부>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 2>


<대부2>와 <대부3>가 첫 번째 <대부>보다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건 1편의 배타적인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말론 브란도의 공백입니다.) <대부2>의 주인공 마이클(알 파치노)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아메리칸드림의 자식입니다. 마이클은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지만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려면 복수나 내 식구 감싸기보다는 오직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춘 합리적인 사고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마이클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비토 꼴리오네가 살아있을 무렵 그는 호텔의 경영권을 인수하기 위해 모 그린을 찾아갑니다. 패밀리는 호텔과 카지노를 원한다고 말하죠. 어림없다며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모 그린에게 마이클은 


'돈을 잃고 있잖아요?'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이득과 손실을 계산하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힘으로 빼앗습니다.



<대부 2>



하지만 그 역시 시실리 가문의 자식이었습니다. 합리적인 이성도 결국은 가족에게 비합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세계를 물려주기 위한 노력이었죠. 그는 아버지 때보다 더 크게 패밀리를 번성시키고 <대부3>에 가서는 돈으로 억지 명예마저 손에 넣지만 비토 꼴리오네와 같은 존경과 신임은 얻지 못합니다.


<대부>에서 결혼을 망설이는 케이에게 마이클은 말합니다. '아버지 역시 다른 힘 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다른 사람들을 책임지는 대통령이나 의원처럼.' 그에 대해 케이는 '그 말은 너무 순진하게 들려요. 대통령이나 의원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잖아요.'라고 합니다. 마이클은 말하죠. '누가 순진한 건지 모르겠군.' 마이클은 순진하게 살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냈으나 결국은 <대부3>에서 코니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합법적이고 깨끗한 상류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내 손만 더 더러워지는구나.' 늙고 병들어 지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날 때 마이클은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딸을 죽게 만든 고독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대부>
<대부 3>



비토 꼴리오네- 마이클 - 빈센트로 이어지는 (사실 빈센트의 대부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듯 하지만세대와 인물의 변화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에서 살아남은 비토 꼴리오네가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고 번성시킨  건 그의 생에 걸맞은 일이었고, 가장 큰 사랑을 받은 마이클이 아버지의 피습 앞에 그토록 싫어했던 패밀리 일을 이어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한 세대가 끝나고 치열함 대신에 합리적 이성이라
는 교묘한 이기주의가 들어서면서 합법적이란 단어는 점점 퇴색되어 이루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수혜인 부와 명예를 태어날 때부터 직접적으로 누린 자식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음악가나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여자아이가 되는 부르주아 세습은 굳이 마피아라는 특수 계급이 아니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도 흔한 광경입니다. <대부>의 탄생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현재는 어디에 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토 꼴리오네의? 아니면 마이클의? 혹은 더 이상 대부의 권위가 먹히지 않는 빈센트의 시대일까요? 


<대부 3부작>이 나온 지도 어느덧 2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대부의 고리를 끊는 세대와 영화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대부>가 무결점 영화인 건 여전한 사실일 겁니다.



<대부>



옛날 영화에서 배우들의 영향력은 영화 전체를 장악할 정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에 나오는 모든 배우들은 너무 훌륭하고 그중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는 단연 돋보입니다.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가 함께 나오는 장면은 화면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지는 느낌마저 들어요. 특히 젊은 알 파치노는 할리우드의 어떤 남성 아이콘을 데려와도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젊은 알 파치노
젊은 알 파치노
젊은 알 파치노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키가 작아 고민하는 배우 류덕환에게 신하균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알 파치노는 키가 160이야.' 신장은 외모의 중요한 조건중 하나가 되었죠. 하지만 알 파치노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 작은 체구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정말로 굉장합니다. 


키? 야, 나 알 파치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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