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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Jun 01. 2018

Restless : 레스트리스

#03. movie sketch


남겨진 사람과
떠나갈 사람


저는 포스터에서 영화의 완성도나 재미를 느낍니다. 예고편까지 갈 것도 없이 포스터의 첫 느낌이 좋아야 영화에 흥미가 생기고 시놉시스까지 읽게 되죠. 물론 잘못된 마케팅으로 좋은 영화를 망친 경우도 여럿 보았습니다만. (예) <지구를 지켜라>, <파주> 예전에 신하균 배우 포럼에서 이해영 감독 <천하장사 마돈나>, <페스티벌> 마케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영화 <페스티벌>은 실제로 노출이 거의 없어서 마케팅할 때 섹스라는 표현을 빼고 섹시 코미디라고 써달라고 했지만 완성된 포스터를 보니 자신이 피력한 의견과 전혀 다른 게 나와 수정을 요구했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한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터로 영화 호불호를 판단하는 저의 경험은 거의 어긋난 적이 없습니다. <레스트리스>를 보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연히 포스터를 발견하고 봐야겠다 싶었죠. 감독이 구스 반 산트라는 걸 안건 그 후였습니다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서는 '포스터 감 신공'을 더 신뢰하게 되었어요.


이 영화는 죽음을 3개월 앞둔 말기암 환자 '에나벨'과 죽음에 집착하는 '에녹', 카미가제 출신의 일본인 유령 '히로시'가 함께 하는 에나벨이 죽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레스트리스>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입니다. 처음 <엘리펀트>를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인 건 아름다운 화면이었습니다. 총기난사라는 끔찍한 사건과 햇살이 화사한 학교 풍경은 그 괴리감만큼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엘리펀트>가 끝나고 '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오면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기난사가 정신병을 지닌 아이의 우발적인 충동 장애라고만 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영화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펀트>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장기는 <레스트리스>에서도 이어집니다. 에나벨과 에녹이 만났을 때 히로시는 말합니다. '왜 저렇게 남자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아파서 삭발한 여자아이에게 무심히 남잔 줄 알았다고 하자 서러워하며 엉엉 울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할머니도 난소암에 걸렸다가 회복하셨는데 회복한 후에도 머리를 민 걸 가장 신경 쓰셨어요. 가발 쓰는 것도 싫어하셨고 머리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가 꺼려진다고 하셨죠. 실제로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상처가 되기도 하는 암 환자의 모습을 영화는 아름다운 캐릭터로 만들어 냅니다.


<레스트리스>


극장을 나설 때 여성 관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습니다. '여주인공 머리 너무 예쁘지 않아?' <레스트리스>는 암환자 캐릭터의 짧은 머리를 동경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게 여주인공이 예뻐서이고 군대에 입대하는 남자 연예인들의 삭발처럼 사실은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잘라낸 머리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죽음을 삼 개월 앞둔 에나벨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예뻐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름다운 화면이 그렇게 간단하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아이 같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기에 모자를 쓰고 멜빵바지를 입으며 마치 그게 자기 취향인 것처럼 행동한 에나벨. 그녀의 삶 때문에 그 모습은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레스트리스>


에나벨이 암환자의 머리마저 패션으로 승화시키는 센스를 발휘하는 데 비해 에녹은 대놓고 미남입니다. 근데 쫌 이상한 미남이죠. 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건 에나벨과 정 반대 지점인 나약함입니다. 에녹은 원망합니다. 먼저 죽은 부모도, 미처 장례조차 보지 못하게 한 이모도 슬픔을 감당할 길 없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합니다. 끊임없이 타인의 장례식장을 기웃거린 건 다른 사람도 나만큼 슬픈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시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모습은 '내 부모의 죽은 모습도 이랬을까?'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에녹은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입니다. 나약한 내면만큼 한치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현실과는 담을 쌓고 상처를 수습하기에 급급합니다. 다른데 집중할 여력이 없는 거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그가 곁에 둔 사람은 죽음을 앞둔 에나벨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히로시입니다. 


<레스트리스>



에나벨에게 죽음이 다가오자 공포를 견디지 못한 에녹은 부모의 묘를 망치로 부수며 슬픔을 분노로 치환시킵니다. 히로시는 에녹에게 화를 내며 너는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 죽은 히로시와 곧 죽을 에나벨, 그리고 그들 없이 죽음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야만 하는 에녹. <레스트리스>는 언뜻 에나벨과 에녹의 러브 스토리에 집중한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연처럼 숨어있지만 사실 영화 전반을 차지하는 히로시처럼요.

예전에 카미카제를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는 게 목표였고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습니다. 카미카제는 인간을 모독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그 일을 명령한 사람도 선택한 사람도, 아직까지 그 희생이 고귀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누구 하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 속 히로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국가에 대한 원망도, 후회도 드러내지 않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돕니다. 에녹이 죽음에 대해 철없는 말들을 토해 낼 때면 화를 냅니다. 사실은 에녹과 같은 친구와 게임도 하고 연애에 참견도 하면서 좀 더 살고 싶었을 거 같습니다. 영화의 끝부분에 히로시가 좋아하던 소녀에게 쓴 편지는 제국주의에 대한 그 어떤 날카로운 비판보다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는 이야기들보다도 훨씬 더 카미카제가 얼마나 슬픈 일이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곧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히로시는 순수하게 소녀에게 안녕을 고했습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죽기도 했던 거죠.


이 세 사람의 관계는 그들의 연령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물들의 나이는 십 대로 추정됩니다.) 잊고 있던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거창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에나벨은 그림을 그리고 히로시와 에녹은 게임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단순한 게임이요. 에나벨과 에녹 역시 집 근처나 병원에서 만나 어슬렁 거리다가 실제 삶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새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전부입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을 나누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스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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