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movie sketch
더 소중한 사람
얼마 전 재개봉한 2005년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극장에서 20년 만에 다시 보았습니다. 히스레저의 전성기가 고스란히 담긴 두 카우보이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 보았던 1,000편의 영화 중 N차가 가장 많은 저의 인생작입니다. 처음 봤을 땐 잘생긴 두 배우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좋았던 거 같습니다. 개봉 당시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에 갔다가 그때 기준으로 충격적인 적나라한 베드신(텐트씬)에 입이 떡 벌어지기도 했죠. (심지어 엄마랑 같이 봤습니다.) 하지만 과감한 정사장면이 화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강렬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름만 알던 이안 감독도 이 작품을 계기로 좋아하게 되었죠.
<색계>로 널리 알려진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와 자국에서 모두 성공한 몇 안 되는 연출가입니다. <와호장룡>부터 <헐크>까지 다루는 소재와 규모가 다양하고 연출 범위가 넓어 제작국가나 사용하는 언어가 자주 바뀌는데도 마치 모국어로 작업하는 것처럼 언제나 안정적인 연출력을 선보입니다. 영문학 고전을 주제로 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했고, 마찬가지로 외국어로 작업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에서 아시안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문화 차이가 큰 동서양을 오가며 작업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인물에 집중하는 그의 작품 스타일에는 문화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 정서가 있거든요. 이안 감독은 영화 속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결코 자기가 만든 인물의 감정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죠. 대신 관객이 주도적으로 인물을 알아가면서 극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계속해서 정보를 제공할 뿐입니다. 캐릭터는 인물의 섬세한 행동으로 보여주고, 일상적인 사건을 여러 번 쌓아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극장을 나선 후에도 작품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폭발적인 에너지로 관객을 흠뻑 적시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피부에 스며들어 인물의 일을 내 일처럼 느끼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N차를 하자 역시나 이 감동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인물의 짧은 시선과 평범한 말 아래 감독이 숨겨놓은 감정 덕분에 관객은 주인공의 심정을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여러 번 볼수록 감정이 진해집니다. 결말을 아는 관객은 두 사람의 무모한 사랑이 더 안쓰럽게 느껴지거든요.
<브로크백 마운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격차이나 부모 반대로 헤어지는 커플보다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동성애로 몰래 만나며 사랑을 이어가야 했던 두 남자의 사연이 훨씬 극적일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퀴어 로맨스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퀴어가 하나의 장르가 되면서 연이어 새로운 명작이 나타나도 <브로크백 마운틴> 만큼 감동적이진 않았습니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는 연출, 관계 중심 서사,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 등 여러모로 취향 저격이었지만 결정적으로 N차까지 하게 된 건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도 매번 같은 여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애니스와 잭이 목장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인물의 관계 중심으로 흘러가는 멜로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과 시대 상황을 선명하게 그리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두 주인공은 모두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았고 재회한 후에도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개봉 당시, 여성캐릭터는 물론 동성애 이미지도 불필요하게 소비한다는 비난도 있었죠.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 시대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지금보다 덜 개방적이었던 2005년 퀴어 영화의 한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니스는 잭을 만나기 전 알마와 약혼했었고 결혼 후엔 딸을 셋이나 낳았습니다. 잭도 로데오에서 루린을 만나 정착하고 하나뿐인 아들을 얻었죠. 반면 잭과 에니스는 재회한 후에도 일 년에 한두 번 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잭과 에니스는 가족에게 불편한 거짓말까지 해가며 무리한 만남을 이어갑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주인공은 에니스입니다. 그는 무뚝뚝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맡겨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사람이죠. 가정에 책임을 다하고 시대 상황을 거스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반면에 그런 에니스보다 더 많은 걸 바란 잭은 만남이 길어질수록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으로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에니스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아 절망하죠. <브로크백 마운틴>이 감동적인 건 에니스와 잭이 서로를 대하는 특별한 태도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잭과 달리 에니스는 하루하루가 빠듯하죠. 이혼과 양육비로 어깨도 무겁지만 원망 한마디 없이 만남을 이어갑니다. 그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생색내지 않고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한다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무덤덤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던 에니스가 유일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상대는 잭뿐입니다. 잭은 부잣집 데릴사위가 되었지만 한쪽으로 기운채 시작한 결혼생활은 끝까지 평등할 수 없었습니다. 에니스와 잭의 잦은 만남에 불만이 쌓인 아내는 말합니다. '왜 항상 당신이 그 멀리까지 가는 거야? 친구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해. 이건 공평하지 못해.' 하지만 에니스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잭은 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셈이 빠른 그녀 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에니스가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르죠.
저는 사랑이야 말로 차별을 시작으로 발전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두 카우보이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입니다. 게이도 아니면서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관계를 맺고, 몇 번 되지도 않는 밀회를 그리워하느라 오랜 시간 함께한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개봉한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서 그 불공평한 태도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무탈한 하루와 오늘을 함께한 옆사람도 소중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존재는 다른 법이죠. <브로크백 마운틴>은 퀴어의 서러움을 장치로 활용한 로맨스가 아니라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제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말처럼 서서 자는 잭을 에니스가 다정하게 안는 회상씬입니다. 관계를 미리 정의하지 않고도 무방비로 마음을 연 두 사람을 보니 평생 그 시절을 그리워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볼 때면 관객인 저도 마치 주인공들처럼 그때가 그립습니다. 당분간 <브로크백 마운틴>을 볼 일은 없겠지만 나날이 구식이 되어가는 투박한 순애보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