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movie sketch
동물의 왕국은
영화가 아니었음을..
<2019 라이온 킹>은 1994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원작인 작품입니다. 다양한 동물이 등장하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삶의 순환이라는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는 스케일이 큰 영화였죠. 동물 세계에서 최고 포식자인 사자를 의인화해 힘의 논리로 질서를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의 왕국을 인간의 삶처럼 표현했습니다. 지금이야 <라이온 킹>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비욘세나 치오텔 에지오포가 성우로 참여하는 게 어색하지 않지만, 1994년 애니메이션 원작 캐스팅은 이례적으로 화려했습니다. 실사 영화도 아니고 당시 기준으로는 애들이나 보는 애니메이션인데 당대 최고 스타 제레미 아이언스가 성우를 맡고 주제가는 엘튼 존이, 영화 음악은 그때도 거장이던 한스 짐머가 맡았으니까요. 보통 이정도 화려한 캐스팅이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성공이 보장된 작품이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준거죠. 빚을 져서라도 스타를 광고 모델로 사용하는 신생기업처럼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겁니다. 화려한 캐스팅은 당시 디즈니가 <라이온 킹>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심작은 크게 성공했죠.
전 어릴 때부터 <라이온 킹>의 팬이라 원작이 극장에서 재개봉했을 때, 2D를 3D로 바꿔 자주가 관객석을 날아다니는 애매한 신기술을 선보일 때도 극장에 있었습니다. 라이온 킹 실사화는 기다렸던 소식이었고 스틸컷이 하나씩 공개될 때마다 설렘은 더욱 커졌습니다. 대단한 작품이 나올 거라 믿으며 무려 1년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전 2019년 버전 라이온 킹이 나름 재밌었습니다. 왜냐면 원작을 향한 저 정도의 애정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놀이동산의 20분짜리 3D 체험관과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원작 애니메이션인 <라이온 킹>은 2D로 제작한 디즈니 작품 중 최대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명곡을 배출한 OST, 탄탄한 스토리로 작품성까지 인정받았죠. 디즈니의 효자중 효자입니다. 인기 높은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건 부담되지만 메리트도 많은 일입니다. 구 디즈니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 참고서인 데다 개봉하면 언제든 극장으로 달려갈 충성도 높은 원작팬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존 파블로 감독은 실사화를 앞두고 원작을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겠다 선언했죠. 현명한 결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19 라이온 킹>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고도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3D 아이맥스로 관람한 <2019 라이온 킹>은 놀라웠습니다. 배경이 바뀔 때마다 아프리카의 생생한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고, 새롭게 탄생한 심바는 밀림 한가운데 살아있는 진짜 아기 사자 같았어요. CG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부분이 <2019년 라이온 킹>을 망치고 말죠.
원작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은 시작과 동시에 관객을 압도하는 오프닝으로 유명합니다. 아프리카 동물들이 총출동하는 영상과 웅장한 음악이 합을 이뤄 절로 감탄을 자아내죠. <2019 라이온 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프닝이 끝났을 땐 오늘 내가 좋은 걸 보겠구나 싶어요. 그런데 감동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화려한 오프닝이 끝나고 본편이 시작되자 뭔가 이상했어요. '어라? 동물이 말을 하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원작도 사자가 주인공인데 뭐가 문제일까 싶으시겠죠. 그런데 동물을 실사화한 <2019 라이온킹>은 생각보다 정말, 많이 이상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동물을 의인화할 때 각 캐릭터의 성격이 잘 드러나도록 생김새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동물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반영해 진짜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사자라도 몸집이나 눈매가 다르고 털 색깔, 걸음걸이까지 차이를 줍니다. 그래서 인간처럼 다양한 표정을 짓고 생김새도 제각각인 캐릭터를 보며 동물이 주인공인 의인화 작품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진짜 살아있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2019 라이온 킹>은 캐릭터를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실사화 한 동물은 생김새에 차이가 없고 아무리 클로즈업을 해도 표정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성우가 연기로 커버할 수 없었냐고요? 배우들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기괴함은 더 심해집니다. (어떤 명배우도 이 영화의 더빙은 살리지 못했을 겁니다.) 마치 동물농장에서 내레이터가 동물의 마음을 과장해서 대변하는 거 같거든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어색한데 심지어 우리 심바는 노래까지 하죠.
원작에서 어린 심바와 닐라는 듀엣곡 <I just can’t wait to be king>을 부르며 기린 머리 위를 뛰어다니고 홍학 목에서 미끄럼을 탑니다. 신나는 음악과 발랄한 이미지는 영상에 리듬감을 만들어냈죠. 그런데 실사판 심바는 진짜 동물이라 움직임에 한계가 있습니다. 표정도 없는 사자가 리드미컬한 노래를 부르면서 앞만 보고 달리는데 신날 리가 없습니다. 리얼함에 손발이 묶인 <I just can’t wait to be king>은 음악과 영상이 평행선을 그으며 진행될 뿐입니다.
저도 개봉 전에는 진짜 사자가 나오는 라이온 킹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동물의 왕국을 보러 극장에 가지는 않죠. 최첨단 기술로 사자를 만들어낸들 진짜 사자를 찍은 영상만 하겠습니까. 라이온 킹은 단순히 주인공이 동물이어서 흥미로운 게 아니라 의인화된 캐릭터로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에 사랑받았습니다. 영화는 복잡한 예술이고 라이온 킹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새로운 기술도, 리얼한 실사화도 좋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도전이 스토리를 전하는 데 도움 되어야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