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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Mar 16. 2019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48. movie sketch


누가 사랑을
평등하다 했는가



요르고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전작 <랍스터>처럼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앤이 안대한 사라를 미로로 인도하는 장면을 넣어 두 사람의 섹슈얼한 관계를 관객에게 암시합니다. 사라는 남편이 있는 공작부인이지만 동시에 여왕인 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비밀 연인이자 권력의 실세죠. 영국의 절대 권력인 앤 여왕은 언제든 사라가 원하기만 하면 나라의 일부분을 흔쾌히 떼어줄 정도로 무능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둘 앞에 야망으로 가득 찬 예쁘고 어린 애비게일이 나타나자 둘의 관계는 변해갑니다. 애비게일은 사라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여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합니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영국 여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랑싸움과 권력투쟁을 그린 영화입니다. 권력의 추가 기울면서 누군가는 사랑으로 권력을 얻고, 누군가는 권력으로 사랑을 유지합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영화는 앤이 사는 성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그립니다. 과한 노출로 바깥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창문과 어두운 성 안, 역광을 받으며 등장하는 사람들까지. 현실감 없는 연출로 성 안 사람들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죠. 겉모습부터 다른 여당과 야당 귀족들은 현재 진행형인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같이 모여 열띠게 토론하지만, 정작 진짜 바깥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정치적 입장은 전혀 다르지만, 여왕에게 환심을 사 권력을  누리고 싶어 한다는 점은 같죠. 그들은 그저 자기 스타일대로 주장하고 그대로 실행하기 위한 권력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의 정치인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아이러니한 인물들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블랙코미디를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성 안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능숙하게 전하지 못합니다. 마샴이 애비게일에게 구애하는 장면이나 질투에 눈이 먼 앤이 바닥에 드러누워 떼쓰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죠. 자기감정에는 솔직하지만 상대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요구가 거절당하면 폭발하고 마는 겁니다. 감독은 권력자들의 유치한 모습을 부각하기 위해 천장이 높은 화면으로 인물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든다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비장한 클로즈업을 넣어 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강조합니다. 극 중 인물과 거리를 두기 때문에 관객은 극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인물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비웃게 되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욕망이 넘치는 주인공들과 감독의 냉정한 연출이 널뛰듯이 조화를 이루는 신기한 영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지루합니다. 자극적인 설정과 코미디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의 동력이 너무 약해요. 애비게일이나 사라의 행동에 특별한 이유가 없거든요. 그냥 영화의 설정이 원래 그런 겁니다. 처음엔 호기심에 몰입해서 보지만 두 시산은 생각보다 길고 어느 순간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면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눈치 빠른 애비게일은 단번에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라를 몰아냅니다. 그녀는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만들어냈죠.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권력을 얻은 그녀가 누리는 거라곤 별 볼 일 없는 귀족 신분과 잘생겼지만 관심 없는 남편이 다입니다. 쓸개는 빼놓고 전심전력을 다해 얻은 권력인데 막상 게임이 끝나고 나니 그녀가 원한게 뭐였을까 싶어요.  


애비게일에게 밀린 사라는 패배를 인정하며 너와 나는 처음부터 앤에게 바라는 게 달랐다고 말합니다. 영화 끝부분에 가면 사라가 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앤을 향한 사라와 애비게일의 목적은 잘 보이지 않아요. 애초에 사라가 앤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냥  그런 설정일 뿐이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영화 속 정해진 규칙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느라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상호작용하지 못합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 사라(레이철 와이즈)



애비게일이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위해 다 벗고 침대에 눕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을 때 수상한 차를 넙죽 받아먹은 사라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 성으로 돌아옵니다.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은 사라를 보고 앤은 예쁘지 않다며 실망합니다. 앤의 사랑은 딱 그 정도입니다. 예쁜 걸 보면 가지고 싶어 욕망하다가 또 다른 마음에 드는 게 생기면 쉽게 옮겨가는. 얼핏 애비게일이 삼각관계의 최대 수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건 앤의 절대 권력 아래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



어리숙해 보이던 앤은 필요한 때가 오자 자기 권력을 맘껏 사용합니다. 사라가 떠나고 곁에 남은 애비게일의 마음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닫자 권력으로 사랑을 요구하죠. 마지막 장면에 똑바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앤과 그녀의 발치에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애비게일의 모습은 진짜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애비게일은 그제야 자기가 처한 상황을 실감합니다. 이 치열한 사랑싸움에 승자는 없었습니다. 사라는 생을 마감하고 여왕은 아끼던 사람을 잃었습니다. 멋모르고 권력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애비게일은 곧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 애비게일(엠마 스톤)



이 작품의 일등공신은 배우들입니다. 개연성이 떨어지고 양식적인 영화에 시종일관 과장된 연기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화면 속을 날아다닙니다. 페미니즘까지 거론할만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명의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여성영화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온전한 자기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영화니까요. 하지만 앤의 역할을 남자로 바꿔도 이야기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특별히 성문제를 다루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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