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만드는 사람들의 기억
진실만이 가장 우리를 덜 다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며, 학부시절 때부터 즐겨 읽었던 악스트 2호 인터뷰에서 공지영 작가 인터뷰의 일부다. 길을 잃을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는 느낌이다. 나는 글을 쓸 때나 생각 정리가 필요할 때, 답을 잃을 때, 또는 오답과 정답 사이의 어느 곳에 서있을 때 이 말을 생각한다.
나는 원체 쓰는 일에 관해 설명하길 싫어하는 편이다. 정의는 사람의 생각과 선택을 제약한다. 허나 글을 쓰는 '마음'에 관해서는 한마디 얹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에게 좋은 글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진실된 마음을 응원하고 싶다.
아스팔트 도로처럼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읽는 사람을 빨리 달리고 싶게 만드는 글이 있는가하면, 강가의 산책로처럼 읽는 순간 자체를 특별하게 반드는 글이 있다. 허나 나는 글이 꼭 길처럼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출발하자마자 추락하는 종이비행기 같은 농담도 충분히 좋은 글이다.
학부 때 나는 여러 글 중에서도 특히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나는 단어를 상쾌하게 쓰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등단이나 출간과 같은 명예를 굳이 원할 필요도 없이 기회가 찾아올 거라 믿었다. 슬럼프나 창작의 고통도 겪지 않았다. 그냥 쓰고 싶으면 썼다.
허나 뜻밖의 고난은 회사에서 찾아왔다. 나는 글쓰기에 관한 원론적인 테크닉은 수 년 간의 경험 덕분에 어느정도 쌓여 있어 입사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허나 문제는 업무를 시작할 때부터였다.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엔 준비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퀘스트를 쓸 수 있겠냐는 팀장님의 질문에 흔쾌히 'yes' 라고 답했다.
처음에 퀘스트를 쓸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문제는 테스트할 때 닥쳤다. 분명 나는 멋있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테스트를 하고 보니 대사 하나하나가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구어적으로 써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너무 일상 대화처럼 스크립트를 구성해버린 거였다.
나는 대사를 하나하나 클릭하면서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걸 느꼈고, 팀장님한테 '팀장님! 지금까지 자신감 가져서 죄송합니다!' 외치고 창문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팀원들은 날 도와주기 위해 이런저런 조언을 했는데, 그건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에 기반한, 정답이라 믿은 취향의 조각이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다. 그 과정동안 나는 여러가지 삽질을 했고, 이미 다 쓴 퀘스트를 다시 갈아엎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지혜를 터득했다.
' 퀘스트는 반드시 NPC가 늘 서두에 상황 설명을 해야 한다. (컷씬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
그건 아주 귀한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쓰다보니 어색함은 많이 줄었으나 내가 쓰는 NPC들이 도저히 내가 만든 인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 글을 썼을 뿐 NPC가 왜 상황을 설명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내가 쓴 대사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여느 때처럼 왕국이 망하기 일보직전이니 몬스터를 잡고 오게나."
"오늘도 왕국이 망한다고 선지자가 찾아와 예언했으니 몬스터를 잡고 오시오."
근 한 달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삼백안을 드러내며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보는 날이 잦았다.
그래서 업무 일정 외의 시간에 글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관이나 지역 설정을 다시 손봤다. 나는 '게임 시나리오라면 이래야 해!' 라는 정의 밖으로 탈출하고 싶었다. 내 눈엔 각각의 게임이 너무 다른데, 남들 눈엔 똑같아보인다는 걸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임스러운 것.'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일부러 이해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었다. 물론 내 생각의 변화만이 날 도운 건 아니다. 재충전을 하는 시간동안 여러 게임을 해보고 전시를 보고 책도 많이 읽었다.
어느 날 팀원 B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이번에 고등어님 퀘스트 읽는데 인물 A가 플레이어한테 하는 대사가 좋더라고요. "
어떤 게 좋았냐고 묻자, 팀원 B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아, 그 뭐였더라... 나는 너를 쥐뿔도 모르는데 당신이 좋다...였나?"
그 말을 듣자마자 웃겨서 졸도할 뻔했다. 내가 쓴 대사는 '당신에게서 생경한 느낌이 든다오' 였다. 뭔가 설명하고 싶은 마음에 나오는 B의 두서없는 말이 재밌도 하고 왠지 당신을 쥐뿔도 모르는데 좋다는 그 말도 새롭게 느껴져 언젠가 대사에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조언을 해준 분들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게 됐다. 그분들도 B와 비슷한 마음이겠다. 자신이 본 장면과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음이었겠구나. 돕고 싶었는데 많이 답답했겠구나, 정확하지 않고 닿을 수 없는 생각 때문에 서로가 힘들었구나.
나만의 진실이라고 믿어서 한 노력들도 돌아보니 모두가 바란 노력이었고 모두의 진실이었다.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다 하다보니 어느새 만족할만한 이야기에 가닿고 있었는데. 나는 쥐뿔도 모르고 있었구나. 그래서인지 아직은 이 일이 생경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정해진 장소에서 출발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라져버리는 농담과 같은 글을 믿는다. 내가 그걸 해내지 못해도 누군간 해낼 수 있을 거다. 그것이 나의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