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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30. 2022

중세 세계관은 어렵다

퀘스트를 쓰는 자의 속마음

현대 구어체 대화만 써본 내가 게임회사 사원이 되고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내가 한번도 써보지 않은 시대의 인물에 몰입해서 글을 써야할 때였다. 중세시대의 기사단원의 마음에 몰입해 글을 써야 했고, 처음엔 당연히 서툴었다. 대학에선 판소리 전집을 읽는 강의만 골라 수강하고 클래식이라곤 정선아리랑만 들어온 내가 가문과 괴물과 마법의 전쟁을 무슨 수로 써낸단 말인가.


타 게임을 열심히 참고하고 중세 문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 소설을 여러번 접한 뒤에야 어색하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세히 읽으면 부끄러울 정도로 많은 허점이 보이고 글을 쓸 때의 어려움도 여전하다.


막이 넘어갈 때마다 최대한 색다른 이야기를 선보이고 싶은 욕심해 사랑 이야기를 첨가한 적이 있다. 재밌으려면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쓴 이야기였고 그만큼 가장 많은 고민이 들었던 대목이기도 했다. 특히 죽은 옛 연인을 괴물로 마주해야 했던 기사의 장면을 텍스트로 설명하기가 꽤 어려웠다. 옛 연인이자 기사였던 동료를 어떻게 설명하지?


" 저 사람은 제 전여친입니다. "


라고 적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 사랑하는 이 ' ' 옛 연인 ' ' 약혼자 ' 등등 많은 단어를 빌려 매 대화를 꾸몄다.


대화 다음으로 어려운 부분은 유저의 선입견에 맞추는 일이었다. 과감하게 적을 줄 아는 용기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전형성을 맞출 줄 아는 게 더 중요했다. 한번은 내가 쓴 퀘스트의 어느 대목에서 신이 실수를 하는데, 이 장면을 설득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다. 소설이라면 장면을 묘사하고 영화라면 구도를 다르게 그려볼텐데 퀘스트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야기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이 사실 실수한 것이 아니었고 모든 미래를 알고 행동했다고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모든 스튜디오의 사정은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방향성을 나에게 맡겨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과감하게 재미를 추구하고 싶은 부분은 열심히 살렸다. 사람들이 많은 대화를 스킵할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대사를 쓰는 만큼 UI 연출이나 클릭할 때 마다 생기는 딜레이 타임도 할 수 있는 한 줄였다. 하지만 그 안의 대사는 읽는 이를 위해 썼다.


퀘스트를 쓰는 나의 속마음은 이렇다. 나에게 읽는 사람의 시간은 소중하다. 그만큼 내 문장이 쉽고 충격적이면서 깊이 있게 다가가길 바란다. 그래서 스킵할 걸 알면서도 읽는 사람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쓴다. 단어가 기억나지 않더라도 좋은 느낌이라도 받고 갔으면 좋겠다고 꿈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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