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는 게 좋다. 사람의 모습으로, 불완전한 언어로만 겪었던 사람이 분명하게 보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아니라, '새끼'일 때 모습이라서 말이다. 몇 개의 어린 시절 사진은 내가 잃어버렸고, 몇 개는 엄마가 창고에 뒀다가 창고에 비가 새 다 버려버렸다.
엄마는 비에 젖어 망가진 앨범을 보고 무척 속상했다고 말했다. 내 어린 시절의 얼굴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몰라서 고등학생의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엄마가 그 자리에서 울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창고에 쏟아지는 비와 비를 맞고 서있었을 엄마를 상상했다. 엄마는 그래도 너희들이 살아있으면 됐다고 했다. 사진이 사라졌는데 왜 목숨이 귀해진 건가.
지금은 아쉽다. 내 사진 때문은 아니다. 그때의 나는 정서도 오르락내리락 불안정했으니까.
대신 나의 어린 엄마의 예전 추억들을 보는 게 재밌었다. 엄마의 과거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정말...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연예인의 인스타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사진이 문득 생각나 엄마에게 물어볼 때, 그것도 비에 젖어 망가졌다고 했다. 그제야 창고에 정말 많은 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이나 연애편지, 그리고 아빠의 거짓말일 줄 알았는데 정말 '수'로 가득했던 고등학생의 성적표가 있었다는 걸.
제주도의 장맛비가 내리는 창고 안에서 어깨부터 젖어갔을 엄마의 옷자락을 상상하면 조금 슬퍼진다. 그래서 그건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흠뻑 젖어 곤죽이 됐을 엄마의 연애편지를 기억하고 싶다.
편지를 쓸 때 엄마의 나이는 지금 내 나이, 스물일곱 정도였다.
' 오리 인형을 선물해줘 고마워요.'
엄마는 이렇게 썼다. 아빠는 왜 오리 인형을 줬을까. 아니면 아빠가 아니고 전 남자 친구였을까? 서로가 멀리 있어야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엄마가 오리 인형을 받고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 오리 인형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굳이 편지를 쓰셨다는 사실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정갈한 글씨를 기억한다. 그 편지 때문인지 나는 나이를 먹으면 글씨가 정갈해질 줄 알았다. 나는 낙서도 정갈하게 하는 어른들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엄마의 습관이 단정한 거였다.
엄마는 세 음절 정도 쓰고 2분 정도 쉰 다음 세 음절 쓰고 쉬셨을 것 같다. 글씨만큼은 한 톨의 먼지 없이 쓰시는 분이니까. 나는 그 오리 인형이 참 궁금했다. 오리 인형이 아니라 토끼 인형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결혼을 했고, 나는 다섯 살 때 방에서 담배 피우는 엄마의 젊은 옆얼굴을 보게 되었다. 인간은 사진에 그런 얼굴을 남기지 않는다. 그 때문에 건강한 몸을 가진 시절이 건강하게만 보이나 보다. 그래서 비 오는 창고에서 사람을 아쉽고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