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나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망했다. 나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작년 여름, 나는 친한 대학 선배에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학교를 다니면서 얼마 안 되는 돈을 절약하는 데에 온 생각을 쏟는 데에 집중하며 살다 보니 졸업이 다가와 있었다. 인턴을 하고 교환학생을 다녀온 애들에 비해서 나는 턱없이 부족한 스펙을 가진 상태였다. 그때 알았다, 나는 열심히 산 게 아니라 애쓰며 살았다는 것을. 사회에선 가난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눈에 보이는 업적이 없으면 능력이 없어 보인다.
몇 분 뒤에 답장이 도착했다.
"좋아하는 분야를 생각해봐. 너 게임 좋아하잖아. "
친오빠 덕에 어릴 때 많은 게임을 했지만 그때 내가 열렬히 했던 게임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유일했다. 선배는 PC방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열정을 발견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개발자 노트를 정독하고 내러티브 디자이너들의 SNS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엔 잘 나가는 게임을 깔고 플레이했다. 책이나 게임을 하면서 생각을 노트에다 몇 줄씩 생각을 정리했다. 노트에 감정을 이용해 대미지를 입히는 캐릭터, 캘리포니아 노숙자 집 만들기 같은 아이디어들을 적었다. 나는 조금씩 느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하고 싶구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글들이었지만 그런 그림들을 머릿속에 남기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깨우는 쾌감이 따라왔다.
그렇게 간단한 문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어떤 회사에 넣었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류합격 문자를 받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되는 일도 시원하게 실패하던 시기였어서 그런지 내가 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필기시험과 두 개의 면접이 남아있었다. 모아둔 돈이 바닥나기 직전이어서 나는 다시 단기 알바를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쌍문의 한 여자대학교에서 방문객의 온도를 재는 일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한 겨울에 학교의 로비와 주차장의 부스를 오가면서 방문객의 온도를 체크했다. 발이 시려서 발에 붙이는 핫팩을 샀고 발이 시린 건 발등이 시리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건조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내 몸에 관해서 섬세하지 못했던 나는 손등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놔둬버렸다. 정신없는 하루들을 보내다 보니 서류 전형에 이어 필기시험과 1차 면접까지 합격했다. 기쁘기도 기뻤지만 내가 뭘 했을 때 잘 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면접을 보기 전 날 싱크대 배수구가 막혀서 뚫느라 고생을 했다. 고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면접을 보고 며칠 뒤 세탁기 배수구까지 막혔다. 전 입주자들이 폭탄 돌리기처럼 떠넘기던 문제들이 나한테 한꺼번에 터진 거였다. 세탁기는 고인 물을 어쩌지 못 한 채 문 틈 사이로 더러운 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바닥에 고인 그것을 닦았다. 집을 치우는 것보다 빌라를 관리하시는 할아버지를 부르는 게 부담이라 골치가 아팠다.
여느 때처럼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천 명 가까이 되는 방문객들의 온도를 체크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자가 왔다. '최종 합격 발표가 났으니 얼른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불안하고 무서웠다. 떨어졌다는 소식이 적혀있을 때 내 마음이 무너지면 어떡하나……걱정이 됐다.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결국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나는 글자를 보자마자 길 한복판에 서서 엉엉 울었다.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조용히 내 옆을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눈물이 말라서 볼이 찼다. 잠시 뒤 할아버지로부터 세탁기를 고쳤다는 전화가 왔다. 세탁기 배수구와 연결된 싱크대 배수구가 막혀서 그런 거였으니 음식물 관리할 때 조심하라는 잔소리도 이어졌다. 나는 수리기사 출장비용을 치르고 할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아가씨 고생 많아요"
할아버지에게 답장이 왔다. 읽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힘내라는 뜻인가? 고생했다는 뜻인가? 아가씨가 있고, 아가씨가 마음이 있고, 마음은 고생을 하는구나. 이런 말도 있구나.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어려운 말이었다.
세탁기는 고쳤지만 왠지 세탁기에 남아있는 빨래를 코인 세탁소에 들고 가고 싶었다. 세탁기 속에 오래 있던 녀석들이라 집에서 빨래를 다시 돌리기가 왠지 찝찝했다. 코인빨래방의 거대한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뽀송뽀송하게 건조까지 시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비닐봉지 속에 젖은 빨래들을 담았다. 몇 개 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묵직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걸 옮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빈약한 근력을 최대한 끌어내 무거운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부지런히 걷다보니 밤거리에서 빨래방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저찌 도착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빨래는 좋은 향을 풍기며 세탁기 안에서 잘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