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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May 20. 2022

살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바람의 나라 그리고 게임

330 전은 내가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게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던 시기다. 그때부터 나는 회사  외의 다른 글을 쓰지 못하게 됐다.


게임 시나리오와 시가 다르다는 자의식 가득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냥 330일동안 일 외에 글  편도  쓸만큼 너무 피로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글을 쓰는 대신 배달 음식을 먹고(주로 해물찜이랑 )   시간이 되면 빠르게 잠들었다(하지만 넷플릭스로 미드  편은 보고 자야 ).


요새는 동료들이 하나 같이 이런 말을 한다.


게임이 재밌지가 않다!


재밌는 게임이 없는 게 아니다.

게임으로 자극을 느낄 수가 없게 됐다는 말이다.


테트리스 블럭이 팡팡 부서져도 너무 재밌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RPG의 어느 시네마틱 연출을 봐도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오히려 나를 일깨워주는 건 옛날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옛날 게임이다. 누가 추억은 최고의 그래픽이라고 하던데 도무지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게임 중 단연 최고는 바람의 나라가 아닐까. 한국적인 배경음과 나무 조각을 누르는 소리가 나던 버튼, 붓모양의 마우스 커서, 동동주를 주던 주모, 한국 신화 속 도깨비 몬스터, 전이라고 부르는 화폐 단위까지 여전히 생생하다.

나에게 옛날 게임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때를 즐기던 내가 있기 때문이다. 윈도우 98 컴퓨터를 키는 나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살아있고, 내 캐릭터는 레벨 20 때까지밖에 성장하지 못하는 주제에 또 바보같이 쥐굴을 들어간다.


300원 짜리 닭꼬치를 뜯어먹는 내가 있고 트램펄린에서 뛰던 아이들 사이에서 혼자 넘어지고는 정신 없는 진동을 느끼던 내가 있고 주술사를 너무나 잘 했던 친구를 구경하는 내가 있다.


바람의 나라를 함께 즐기던 친구는 부산에서 제주도로 전학가면서 당연하게도 관계가 끊겼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오랜만에 옛날 아이디로 접속했는데... 놀랍게도 여전히 바람의 나라에서 친구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편지를


보냈다.


나 기억해?



편지는 읽혔을까?


조그만 기대만 남은 채 나는 다시 바람의 나라를 잊고 살았다.


성황당 할머니는 죽은 나를 살려달라고 하면 늘 기회를 주시는데 주식회사 넥슨은 아직도 다람쥐를 뿌리는데 지나간 시간은 아무런 기회 없이 흘렀다.


옛날 게임은 여전히 서비스되는 기억, 자극적이고 인상적인 추억. 재개발되지 않는 가상의 도시...


누구는 데이터 조각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게임만큼 사실적인 건 없다. 그러니 몇 년 전에 지운 게임을 다시 접속하고 싶어지는 거겠지. 경험하고 싶은 기억을 느끼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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