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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브 Oct 24. 2021

파국-상

안경과장 15편

안경 과장은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다가 심장이 꽉 막히는 통증이 들어 벌떡벌떡 일어난다. 오늘 새벽에도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난 안경 과장은 부엌으로 가 물 한 잔을 마셨다. 그대로 서서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또 숨이 막혔다. 무리해서 이사 오느라 퇴직금도 중간 정산하고 2 금융권 대출도 당겼다.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안경과장은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 컵을 꺼냈다. 부엌에는 영국에서 유명한 브랜드의 커피 머신과 캡슐커피 머신이 놓여 있지만 안경과장은 찬장 깊숙한 곳에서 믹스 커피를 꺼냈다.


커피 머신은 고장 난지 오래됐고 캡슐커피는 유지비가 만만치 않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둘 다 4번의 이사에도 살아남았다. '손님들 보여주는 디피용'이라 절대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안경 과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 보기에' 그럴듯할 것.



옷을 갈아입으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귀가 밝은 아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출근해?”


경은이 목 뒤로 돌아간 반클리프 목걸이 줄을 앞으로 바로 하며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경은이 또다시 거품을 물었었다.

분명히 샤넬백에 반클리프 목걸이를 하고 예비신랑 자랑을 해댈 텐데 자기는 그 꼴을 절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경은은 단식투쟁에 매일같이 안경과장을 새벽까지 잠을 못 자도록 언성을 높이더니 기어이 목걸이를 손에 넣었다.


친구의 청첩장을 받은 날, 경은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엔 예비신부를 포함한 네명의 여자가 똑같은 모양의 검은 펜던트를 차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며 마치 '넷아줌마파 당원 목걸이' 같다며 핀잔을 줬다가 시골 촌놈 티내냐며 아내가 한 술 더 뜨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았었다.


“아니, 휴가 썼다니까. 지금은 새벽 배송. 오늘부터 다시 한다고 했잖아.”


대답하는 안경과장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불퉁했다. 대기발령이 길어지며 결국 안경과장은 무급휴가를 낸 상태이다.


“아, 왜 성질이야? 그리고 왜 또 새벽 배송? 작작 좀 해라, 무슨 돈에 환장한 사람처럼… 왜 이렇게 요즘 돈독이 올랐어.”


패딩에 팔을 꾀던 안경과장은 돈독이 올랐냐는 경은의 핀잔에 열이 확 올라 발끈하고 말았다.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이러는 거 아냐!”


“아니, 맨날 허리 아프다고 병든 닭처럼 주말에 누워 있기만 하니까.. 이제 나이 생각해야지!”


“그래! 니 서방 늙어서 좋겠다! 내가 돈독이 올라서 이러는 줄 아냐?! 어?! 목걸이 그거! 그런 거 열라 사다 바친다고 내가 이 지랄 아냐!”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던 경은의 손이 뚝 멈추더니 눈을 모로 치켜떴다.


“뭐야, 목걸이 꼴랑 하나 가지고 또 눈치 주냐? 돈 번다고 유세야? 다른 집은 와이프가 말도 꺼내기 전에 남편들이 생일이다 뭐다 하면서 꽃다발이랑 같이 선물도 착착 안겨준다는데, 나는 단식투쟁에 난리지랄부루스를 춰야 하나 떨어지고. 왜, 거지처럼 굽신거리기라도 해야 돼? 어?!”


“에이 지겨워! 이놈의 집구석!”


안경과장은 안방 문을 쾅 닫았다. 몽클레르 패딩에 구찌 가방을 들고 BMW 차키를 챙겨 집을 나섰다.



경은은 현재 대출상황에 대해 모른다.

그녀는 애초에 안경과장이 5천만 원만 투자한 걸로 알고 있다. 경은을 앉혀 놓고 가상화폐 투자에 대해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머리 아프다며 듣기 싫어했다. 그가 보기에 아내는 영 경제관념도 없고 숫자에도 도통 약하다.


‘무식하기는.. 연예인 기사만 보지 말도 뉴스라도 좀 보던가..’


안경과장은 그런 아내를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둘이 여태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밖에서도 똑똑하다는 여자들한테 치이는데 집에서도 똑똑한 와이프한테 치이면 못 살 것 같았다. 자고로 한국 남자란 집에서 만큼이라도 큰소리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소일거리로 부업을 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경은이 돈 벌어온다면 소원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집안일을 분담하자느니 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새벽 배송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새벽 배송을 마치고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자동차 열기로 녹였다. 그리고 요즘 짬 날 때마다 했던 대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너머로 경쾌한 클래식과 함께 알 수 없는 영어만 흘러나왔다. 오늘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심장이 쪼그라들며 폐에 있는 공기가 순식간에 말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한 안경과장은 출근도장 찍듯이 코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커뮤니티에서는 아무래도 거래소가 문 닫고 튄 것 같다며 이제라도 같이 신고하고 국민청원을 하자는 글이 매일같이 올라왔다.


'인증게시판'에도 ‘40억 대박 인증’ 글 대신 커뮤니티 탈퇴 글이 도배되었다. 하지만 안경 과장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존감은 낮으면서 자존심만 센 안경과장에게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


오늘까지 모두 8억 원을 잃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계정을 중지하려고 거래소에 계정 차단을 요청했지만 한 달째 답변이 없었다. 매일같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지만 알 수 없는 영어멘트만 되풀이 될 뿐이었다.


‘아니야, 한탕만 하면.. 한탕만 크게 터지면 다 만회할 수 있어.’


모든 일이 순식간이었다. 초반에 몇백, 몇천을 잃었을 때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첫 2800만 원을 손해 봤을 때도 게임머니, 2800 골드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손실이 9000만 원 정도가 되자 아차 싶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돈이 필요했다.


한방만 터지면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모님, 누나들, 장인어른의 돈까지 끌어왔다. 제사 때문에 온 가족이 안경 과장의 본가에 모였을 때 부모님과 누나들을 설득했다. 처음엔 안 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가족들 앞에서 들고 간 노트북으로 차트까지 띄워가며 일장연설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가족 단톡방에 차트만 띄워주면 누나들은 알아서 더 투자해 달라며 이리저리 꿍쳐놓은 쌈짓돈을 안경 과장에게 송금했다.


그들은 아직도 안경 과장이 돈을 관리해준다고 믿고 있다.


‘내가 날리고 싶어서 날렸나? 막말로 사기 친 것도 아니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유튜버가 추천해준 코인을 믿었다. 실시간으로 띄워준 차트에서 이익률 500%는 순식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초반 수익을 냈고 투자금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에 은행으로부터 2500만 원을 더 대출받았다.


그러나 안경 과장이 구매를 끝내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조직적으로 가격 조정을 유도해 투자금을 뜯어가고 유튜버는 뒷돈을 챙기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투자금은 3분의 1로 토막 난 상태였다.


‘한탕만.. 딱 한탕만 크게 터지면 되는데..이번에 오르면..'


상승가일 때 코인은 20억까지 치고 올라갔었다. 그때의 짜릿함과 승리감을 도무지 떨쳐내기 어려웠다.

마치 도박 같았다.


20억.

실제로 만진 적도, 눈으로 본적도, 통장에 찍혀본 적도 없지만 안경 과장에게 있었던 코인 20억 원 치. 그러나 게임머니와 달리 그는 은행과 회사와 제2금융권과 가족들에게 빚이 생겼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장모님과 처남에게 돈을 더 빌려 볼 생각이다. 안경 과장은 최후의 보루로 고향 동생이 한다는 사업에 투자해보려고 한다. 고향 동생은 경기도 외곽에 가상화폐 채굴장을 만든다고 했었다. 중고로 서버와 그래픽 카드만 사서 설치하고 전기세만 내면 24시간 코인 채굴이 가능하다며 같이 해보자고 했었다.

 

“형, 지금 유튜브 보면 채굴 관련 영상만 하루에 수백 개 올라오니까 한번 봐봐요. 내 말이 진짠지 아닌지. 이건 무조건 먼저 하는 놈이 이기는 거예요. 진짜 나 믿고 한 번만 투자해봐요.”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잘 만지던 놈이니 영 헛소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인생은 한방이야. 이거야말로 돈을 긁어모으는 거 아냐. 뭐하러 이 고생을 해. 어차피 가상인데.. 가상화폐 그까짓 거 만들면 되는 거 아냐.. 발굴? 아, 아니다, 채굴이랬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래서 인생은 한방이라는 말이 있는가 보다.



주택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왼쪽 모퉁이에서 차 한 대가 불쑥 들어왔다.


끼이이익! 빠아아아앙!

아직 이른 시간, 조용한 주택가에 경적소리와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빵!

안경 과장은 신경질적으로 욕을 하며 주먹으로 짧게 클락션을 한번 더 내리쳤다.


“어디서 쌍기차 모는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운전을 저 딴식으로…”


벨트를 풀려고 거칠게 움직이던 손이 딱 멈췄다.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상대방의 차. 얼핏 카니발인 줄 알았던 흰색 차는 자세히 보니 국산차가 아니었다.


포르셰는 미동도 없었다.

안경과장처럼 빵빵 거리지도, 창문을 내려 삿대질도, 욕지거리도 없었다.


뒤로 끼익. 앞으로 끼익. 다시 뒤로 끼익. 오른쪽으로 끼익.

안경 과장의 차는 끽끼익 후진하며 보도블록 위에 오른쪽 바퀴 두 개를 기대고 기우뚱하게 섰다.

그동안 포르셰는 고요히 서 있었다.


까딱.

포르셰 운전자는 안경 과장의 차를 스치며 감사의 표시로 손을 들고 까딱였다.

차창 너머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상대편 운전자와 눈을 마주쳤다. 붉은 햇살이 차 안으로 쏟아져 백미러에 비친 안경 과장의 얼굴이 붉었다.


안경 과장은 사이드미러를 통해 좁다란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그 포르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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