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 속에 함께 있어."
우리는 끊임없이 말을 하며 소통한다. 말은 소통의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전하기도 한다. 어떻게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할 수 있을까? 바로 공감의 힘이다. 말보다 강력한 침묵의 힘은 공감이다.
비언어적 표현은 전달력이 강하다. 말하지 않고도 충분히 상대와 소통할 수 있다. 말보다 강한 침묵의 언어를 공감으로 채우자.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몸짓으로 마음이 전해질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교수이자 심리학자인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 1939~)이 말한 '메라비언의 법칙'이 있다. 그의 저서 《침묵의 메시지》에 소개된 이 법칙은 비언어적 표현이 소통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소개한다. 태도, 몸짓, 자세의 외적인 면은 비언어적 요소 중 시각 요소에 속한다. 목소리 톤, 음의 고저는 청각 요소이다. 대화할 때 시각 요소는 55%, 청각 요소는 38%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언어적 요소인 말은 7%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 결과를 보였다.
이는 소통할 때 비언어적인 요소가 말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즉,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첫 번째 요인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통하는 가운데 말하는 사람의 태도와 몸짓, 목소리와 자세는 93%의 영향을 준다. '7%-38%-55%' 법칙이라고도 하며 말보다 큰 비언어의 영향력이다.
2011년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총기 난사 희생자 추모식이 있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연설했다. 그 연설은 침묵을 통해 공감이 얼마나 큰 메시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지 말해준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아이들이 꿈꾸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한 후 오바마는 10초 후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약 40초 이상 식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통해 언어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추모식장은 순식간에 슬픔의 바다가 되었다. 그의 침묵으로 말보다 강한 애도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오바마는 말하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더 길었다. 말없이 흘렀던 침묵의 시간 동안 어떻게 청중들은 같은 감정을 느끼며 빠져들 수 있었을까? 바로 공감이 열쇠이다. 오바마는 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을 공감했다. 청중은 오바마의 그 마음을 침묵의 메시지에서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침묵은 말할 때나 들을 때나 효과적이다. 공감을 동반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비언어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앞서 말했듯이 침묵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공감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공감하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비언어적인 표현이 뒤따르면 어떤 말보다 강하게 느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감이 없는 입 다묾은 침묵도 경청도 아니다. 입 다물다가 관계가 끝나버린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듯이 말로 표현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에겐 말센스가 필요하다. 필요한 말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사용해야 한다.
말센스가 있는 사람은 상대의 말하는 의도를 알기에 적절한 태도를 보인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자신이 말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순발력 있게 결정한다. 진짜 공감하며 침묵한다면 그에 맞는 비언어적인 표현이 물 흐르듯이 따른다. 말하고 싶다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만져주는 말을 적절하게 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내면에 귀 기울일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공감 없이 흐르는 침묵은 공허하다. 너무 말하지 않다가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 상담을 받으러 오던 직장인 미혜 씨가 어느 모임에서 겪은 사례이다.
모임의 리더인 이 교수는 사람에게 실수가 없어 좋은 평판을 들었다. 말이 없으니 자연히 실수할 일이 적었다. 반면 그는 관계의 기회를 놓치는 리더였다. 일이 바빠 본의 아니게 자주 불참하던 미혜 씨 부부에게 1년이 지나도록 연락하지 않았다. 리더로서 어떤 시도나 표현도 없이 침묵했다. 공감도 배려도 아닌 공허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 미혜 씨는 그 모임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직장에서 큰 오해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모임에서 억울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먹먹한 미혜 씨의 토로가 끝난 후,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은 미혜 씨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리더인 이 교수는 적절한 피드백 없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렸고 또 침묵이 흘렀다.
“뭐지? 이 침묵은? 괜히 말했구나. 이런 사람들한테…. 날 두 번 죽였네.”
미혜 씨는 말한 것을 후회하며 그 모임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침묵도 필요하고 과묵도 좋다. 그러나 공감했다면 비언어의 어떤 몸짓으로라도 소통했을 것이다. 아무런 표현도 없는 어색한 침묵은 배려와 공감이 없었던 거다. 이 교수의 침묵은 칼날이 되어 그녀를 찔렀다. 때를 가리지 않고 입 다물다가 관계가 끝나버리는 침묵의 소유자가 되었다. 정작 자신은 영혼 없는 침묵이 미덕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피상적인 관계는 겉으론 별 탈 없이 무난해 보인다. 그러나 각자 견고한 성 안에서 나오지 않아 진솔한 소통이 어렵다. 미혜 씨는 상담을 통해 모임 때마다 느꼈던 답답함의 이유를 알고 나니 한결 홀가분해졌다. 자신과 타인의 문제를 구분하였고 공허한 만남을 정리할 수 있었다.
대화 중, 침묵이 아름다운 것은 공감으로 채워져 있을 때다. 공감을 동반했는지에 따라 침묵의 가치가 정해진다. 어떠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상대의 침묵을 잘 견뎌내는 것은 중요하다. 침묵할 수 있는 능력이 성숙의 지표가 되며 자제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일 수도 있다.
침묵이 여전히 아름다워지려면 진정 마음으로 상대의 이야길 잘 듣는 게 우선이다.
잘 들으면 공감할 수 있다.
공감하면 가장 적절한 언행이 뒤따른다.
이야기하는 상대의 내면에 귀 기울여 공감을 수반할 때 침묵은 빛난다.
비언어는 강력하기에 더욱 그렇다.
너도나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세상에서 침묵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공감으로 채워진 침묵은 당신과 나의 대화를 밀도 있게 완성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