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100 글]93일, 아흔세 번째 썰
평안했던 지난달이 무색하게 최근 회사에 폭탄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대표이사 교체. 예고된 것도, 예정된 것도 없었던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임원진들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으니 업무에 집중하라는 말을 남겼으나 뒤에서 들리는 내용은 다소 흉흉했다. 덕분에 회사는 내내 뒤숭숭하기만 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붕 떠있었고, 2명 이상 모이기만 하면 서로의 정보를 나누기 급급했다.
동시에 내가 맡았던 업무에도 비상이 걸렸다. 내부 결재를 다 받아놓은 사안이었는데 갑자기 틀어지게 된 것. 거래처와 논의가 전부 완료된 건인데 급작스럽게 말이 바뀌게 된 것이다. 가타부타 설명하긴 그렇고, 거래처 담당 직원이 바뀌게 되었는데 인수인계 과정에서 중요한 사안이 누락된 것. 퇴근 후 저녁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점에 그걸 해결해 보겠다고 난리 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싹하다. 그쪽에서 깔끔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보상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사고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통통 터졌다. 사실 그리 심각한 사안들은 아니었다. 해결 방안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일들이었고, 해결할 수 있는 연차였다. 제 때 보고만 올라간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해결되었다. 내 멘털만 빼면 말이다.
어느 날 사무실에 있는데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우울해지고 모든 것에 위축되었다. 그랬는가 하면 잠도 오지 않았다. 새벽 3시 넘어서 잠들 때도 있고, 일찍 잠들어도 새벽 5시 전에 일어났다. 커피를 사발 채로 들이켜는 나날이 이어졌다. 갑자기 왜 이러지 싶었다. 평소와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 말이다. 회사가 X 같은 거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딱 하나 달라진 것. 최근 주말에 멀리 나간 적이 없었다.
매주 거의 빼먹지 않고 하루 100km씩 운전해서 돌아다녔는데 최근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러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원래 안 좋았던 상태가 병원과 운전의 콜라보로 많이 좋아졌었다. 그냥 운전연수 겸 엄마랑 놀러 다닌 것뿐인데 나름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을 준 모양이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조금 민망해졌다.
그래서 급하게 연차를 쓰고 외할머니댁으로 떠나려는 엄마의 일정에 합류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늘 편도 265km 거리에 떨어진 할머니 댁으로 떠났다. 비가 왔지만 길은 막히지 않았다. 비 온 뒤 하늘은 웅장했고, 넓게 펼쳐진 평야는 광활했다. 습했지만 공기는 청명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는 길을 내 손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4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했는데 피곤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동시에 속에 울혈처럼 남아있던 찌꺼기에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단단해서 겨우 금이 갔지만, 언젠가는 툭 부서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쩐지 지금에서야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