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100 글]83일, 여든세 번째 썰
나는 사무실에서 많은 종이를 사용한다. 무역부에서 일하다 보니 본사에서 오는 모든 인보이스들을 관리하고 있다. 사실 모니터로 봐도 되지만 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또 인보이스에 문제가 있을 경우 용이한 보고를 위해 부득이 프린트를 해서 보고 있다.
처음에는 볼일이 끝난 서류는 미련 없이 파쇄했다. 가지고 있어 봐야 자리만 차지하니까. 그러다 한 번에 버리려고 종이를 모았는데 그것이 한 박스 넘게 나오자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얼마지, 이거 다 나무 잘라서 만든 것인데, 뒷면은 깨끗하지 않나, 등등. 평소 서류를 볼 때 최대한 깨끗이 보기 때문에 그냥 버리는 것이 더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면지를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보이스를 프린트해야 할 때는 과거 모아 뒀던 서류의 뒷면을 이용했다. 간혹 사무실의 팩스로 들어오는 광고성 프린트물도 그냥 버릴 수 없다. 예전에는 메모지를 따로 사서 썼는데 지금은 그것을 절반으로 잘라 쓰고 있다. 물론 보고용으로는 다른 종이에 옮겨 쓰지만, 나 혼자 보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 평소 만년필을 쓰는데 무거운 질량의 A4용지를 쓰기 때문에 잉크가 번지지 않아 쓰기에도 좋다.
다이어리가 꼭 필요한 자리에는 예전부터 써오던 노트를 들고 간다. 그 외에는 모두 이면지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용 다이어리를 따로 구매하지 않은지 꽤 되었다. 그 돈을 아꼈다고 아예 안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돈과 종이, 모두를 낭비하지 않았다는 뿌듯함, 뭐 그런 것 말이다.
최근 사무실에서 볼일을 다 본 서류들을 정리했다. 이면지로 사용 가능한 종이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양쪽 면을 꽉꽉 채워 쓴 종이도 많았다. 제 쓰임을 다하고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되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 [터미네이터 2]의 명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그 문장. I will be back. 그렇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