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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틴 Dec 02. 2021

친애하는 나의 두려움에게

사회생활을 잘하기 위한 출발점

직장인으로 살면서 참 어려운 고비를 많이 맞았다. 내 숱한 퇴사의 흔적은 그런 고비를 끝내 넘지 못한 증거이기도 하다. 반대로 고비를 잘 넘기면 경험 자산이 되고, 이후의 회사 생활은 증가한 경험치만큼 수월해진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고 아무것도 모를 때 두려움에 먹히기 쉽다. 그리고, 잘 해내야 할 때. 두려움을 부르는 최적의 조건이 아닐까? 직장인이라면 신입으로 취업을 했다거나 경력자로 이직을 했을 때 이런 상황에 놓인다. 낯선 환경에서 적응해야 하는 숙제와 함께, 얼마나 잘 해낼지 기대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니까.


내 경험을 한토막 얘기하자면, IT 경력 10년 차를 훌쩍 넘겼을 무렵 어느 회사에 입사를 했다. 잦은 이직 덕분에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도가 텄다. 최소 3일, 보통 일주일만 지나면 업무 이외의 웬만한 것들은 금세 파악을 했다. 직원들과 밥을 먹고 커피를 몇 번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에 스며들기 쉬워진다. 서로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뭐 그것도 괜찮다. 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일 테니 나도 그렇게 맞추면 된다. 회사에서 중요한 건 업무니까. 


회사마다 상황마다 시기마다 다르지만, 보통 입사 첫날은 업무에 필요한 세팅을 하고 티타임도 가지며 여유롭게 보낸다. 우리 회사는 고객사와 갑을관계에 있었고 직원들은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모두가 일당백으로 바쁜 시기에 경력이 가장 많은 내가 입사를 한 상황! 첫날부터 나의 역할은 실무만이 아님을 파악했다. 실무자겸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업무파악은 상급자가 나를 불러서 속사포로 던지는 말들로 대신했고, (고객사가 사용하는 툴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툴로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몇 시간 후에 고객사와 화상 회의가 잡혔고 그 회의 전에 나는 결과물을 전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연히 결과물을 내려면 익숙하지 않은 툴로 작업을 해야 한다.


정신을 챙기기 전에 전쟁터로 내보내 졌고, 당황스러움에 몸이 신호를 보낸다. 업무를 전달받고 몇 분만에 머리가 확 무거워지더니 숨이 깊이 쉬어지지 않는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지만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 경력이 있어도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고객사에게 내가 입사한 지 몇 시간 안됐다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정말이지 공포가 따로 없다.


<업무 파악 이전 + 툴 사용 미숙 + 회의 잡힘 + 회의 전에 결과물 전달>은 내 관점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상급자가 모르는 건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라고 하지만 뭘 요청해야 할지 조차 모르겠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잔뜩 무거운 상태에서 상급자에 SOS를 보냈다. 그는 바쁘게 전화로 뭔가 길게 설명해주는데 그의 언어는 내가 알아듣기 너무 어렵다. 급한 상황이니 귀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알려주는 얘기조차 못 알아들으니 답답해지면서 짜증까지 올라온다.


신입이면 신입대로 어렵고 경력자는 경력자대로 어렵다. 머리에 오른 열은 내려갈 줄 모르고 명치도 계속 뻐근하고 답답하다. 내가 고객사에 문제를 일으키면 어쩌지- 최대한 정신줄을 잡고 자료를 뒤적거리며, 상급자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어떻게든 작업을 해보려고 진땀을 흘린다. 이상하게 멀쩡하던 사이트에 오류까지 뜬다. 노트북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복사&붙여넣기마저 영문이 거꾸로 표시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몰린 그 느낌. 신이시여!! 제발 도와달라고 신을 찾는다. 이걸 해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마음속으로 빌면서 의식적으로 긴장을 풀려고 노력한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점심을 먹을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서 내내 씨름을 한다. 신기한 건 늘 어찌어찌 해낸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험을 좋아하면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상황이 부담스럽고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다.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다가 정말 시간에 맞출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면 그제야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사실, 몰라서 작업을 못한다고 해도 아주 큰일이 벌어지진 않는다. 지구가 반쪽이 나는 것도 아닌데, 내가 해내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커다란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게 두려운 감정에 한 번 빠지고 나면 거기서 살아 나오더라도, 그 두려움이 반복될 확률이 높다. 겨우 살아 나왔는데 몇 걸음 못 가서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다시 감정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것! 이런 두려움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내가 빠져버린 감정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 감정 속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감정 속에 있지만 그걸 지켜볼 수 있는 건 엄연히 다르다. 신체적인 증상이 생긴다면 그 증상이 어떤 건지 샅샅이 몸을 스캔해보고, 이런 증상이 일어난 이유를 명확하게 정리해보자. 내 경우엔 준비되지 않았는데 상급자가 모르는 걸 던졌고 급박하게 해야 하는 상황이 내 증상을 발현시킨 요인이었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뜯어보니 위에 적은 4가지 요소가 있었다 - '업무 파악 이전, 툴 사용 미숙, 고객사 회의 잡힘, 회의 전에 결과물 전달'


저 요소들이 힘을 합쳐서 나를 감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 조건을 하나라도 깨야 한다. 조건에 앞서서 우선 전제를 깨 보는 거다. 무조건 지시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것. 현실적으로 나는 업무 파악조차 안 된 사람이다. 상급자나 다른 직원들은 쉬울 수 있지만 나는 처음으로 겪는 일이니까 당연히 모르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면엔 처음부터 잘 해내고 싶은 압박이나 자격지심 같은 것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툴로 기존 작업자와 똑같은 결과를 내려는 욕심을 버리자. 꼭 해당 툴을 써야 한다면 시간을 더 요구하던지, 시간 준수가 우선이라면 다른 툴로 결과물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툴은 도구일 뿐, 그 도구로 표현하려는 무언가를 알려주면 된다(사실 이것도 말은 쉽지...). 이런 복잡한 걸 다 떠나서 상급자에게 '지금은 나 이거 못한다- 배 째라-' 해버리면 사실 끝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참 쉬운 사람도 있는 반면, 나한테는 그게 너무 어렵다.


업무 파악 전이라고 어필을 했어도 대충 알려주면서 내게 넘기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알려주는 걸 못 알아들으면 그때부터는 내 잘못이 되어버린다. 어찌 보면 폭탄 돌리기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폭탄을 준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끝까지 질문해야 한다. 내 손에서 폭탄이 터져도 죽지는 않겠지만 이 폭탄은 심리적인 위축, 자책, 후회를 가져오는 놈이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도 나 자신을 잘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 성격은 어떻고 나는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남들에 비해 어떤 특성이 있는지 자기 객관화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경우, 나는 혼자서 처리하려고 하고 완벽을 추구해서 스스로도 참 피곤하다. 데드라인이 주어지면 불가능해도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맞추려고 애쓴다. 이걸 적절히 잘 쓰면 장점이 될 수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면 단점이 된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저변에 어떤 마음이 숨어있다. 이 사람은 능력 있다- 확실히 ㅇㅇ출신이네- 경력자라 다르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 결국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그 욕망을 솔직히 인정하면 변화가 조금씩 시작되지 않을까? 물론 쉽게 내려놓아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여전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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