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틴 May 24. 2023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축복

최승자 시인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p.59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p.162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공포가 꽃수레에 올라타고 자신의 목적지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인지도 몰라. 공포가 자신의 파괴성을 못 이겨 죽음으로써 자신을 파괴해버리기 때문이지. 한 번 생겨나 확장하면서 힘을 얻은 감정은 그 자신의 힘과 무게를 주체 못해 바깥으로 쏟아져나올 수밖에 없어.


p.165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달라지고 싶다는(더이상 죽음을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이미 일어났고, 그것의 가시적 사건으로서 미국행이 주어졌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내가 이미 내면으로부터 변하고 싶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믿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고 그곳 세상을 다르게 보지도 않았으리라는 거야.


p.170

아마 우리 인간들의 삶도 그럴지 몰라. 언젠가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는 인생이 겉으로는 무시무시하고 불행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잘 지내고 계시죠? 머리 진짜 화려하신데요?!"

아주 오래전 인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프로필 사진에 올린 내 탈색머리는 호기심을 자극하여 말을 걸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었다. 이어서 메시지 알림이 서너 번 더 왔지만 나는 휴대폰을 열지 못했다.


내게 연락한 사람은 10여 년 전에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였다. 스멀스멀 먹구름이 모여들면서 마음 한쪽이 빠르게 그늘졌다. 이건 그 사람 때문이라기보다 그때 그 시절에 얼룩졌던 내 마음 때문이었다. 쉽게 무시할 수도 답할 수도 없어서 몇 시간을 미적대다가 가볍게 답을 하고 넘겼다.

"네 잘 지내요. 탈색 두 번은 못하겠네요 ㅋㅋ"


그런데 하루 지나서 그가 또 불쑥 메시지를 보냈다.

"직장 잘 다니고 계세요? 전 00님과도 가끔 만나요."

역시. 내 의례적인 답변으론 부족했겠지. 다른 동료 이름을 꺼내는 걸 보니 쉽게 끝나지 않을 대화라는 감이 왔다. 어떻게 해야 이 대화를 빠르고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내가 너랑 연락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만나서든 온라인으로든 근황을 나누고 싶진 않아. 얘기를 꺼내다 보면 우리는 분명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 뻔하니까. 그리고 너는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올리겠지. 그때 그 시간들이 얼마나 기쁨이자 슬픔이었는지 구구절절이 말하고 싶지 않아. 내가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렇다고 거짓으로 꾸며대기도 싫어. 그러니까 이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다가오는 너를 밀어낼 방법이 없을까.


나는 여행 카드를 꺼냈다. 답이 늦는 것도 답변이 부족한 것도 여행 중이라면 다 이해될 것 같다. 실제로 내일모레면 여행을 떠나니까 시간을 조금 앞당긴 거라고 치자. 그리고 궁금해할 만한 정보도 하나 던져주면 되겠지.

"아하~ 출근은 안 해요. 제가 여행 중이라 나중에 연락해요."


누구라도 그러하듯,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시절이 없겠냐마는, 그 시간 속에 사로잡혀있다가 잘 흘려보낼 수 있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과거에 머물고 싶지 않다. 지난 날과 지난 사람이 드문드문 떠오르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고 이렇게 잊히고 있어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불쑥 과거의 인연이 나타나서 내 망각을 테스트하는 것 같다. 불편한 무언가에 마음이 건드려지는 걸 보면 나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일까. 댐으로 가둬놓은 물을 조금씩 방류해서 이제는 물이 가득 차있지도 않은데 나는 왜 여전히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다리가 잘려나가서 없는데도 그 다리에 가려움을 느낀다는 얘기와 같은 맥락일까.


시인의 말처럼, 분명히 오래전에 떠났지만 나는 아직 나 자신에게로, 나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뭐 어때. 불행해 보일지 모르는 이 과정도 축복이라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없는 아이들, 어쩔 수 없었던 최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