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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Jul 03. 2021

이런 꼴찌라면 만 백번도 좋아!

달리기, 장렬하게 깨지며 멋지게 전사했다.

나는 마지막 주자였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꼴찌였다. 앞 주자에게 배턴을 받았을 때 다리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가볍던 다리는 백 미터도 못 가 천근만근이 됐지만, 몸은 충분히 버틸만했다. 지치고 힘겨운 몸과 달리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조금만 더 달리면 이 힘겨운 달리기를 끝낸다는 생각과 등위는 꼴찌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올림픽이든 작은 학교 운동회든 릴레이는 육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종목이다. 모든 관객의 눈은 릴레이로 향하고 마지막 선수는 그중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1등은 1등대로 꼴찌는 꼴찌대로. 다행이랄까 아쉬움이랄까? 내가 참가한 릴레이에는 관중이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선수들도 대회 참가 전에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했으니 관객들이 들어올 방법은 없었다.



4백 미터 중 1백 미터를 지났을 때 내 다리의 회전 속도는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중간에 4분가량 쉬기는 했지만, 벌써 네 번이나 4백 미터를 최선을 다해 달렸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네 명이 한 조를 이뤄 릴레이로 10km를 완주하는 대회다. 장내 아나운서는 꼴찌로 들어오는 나를 응원할만한데도 그러지 않았다. 1등으로 들어온 팀과 그 이후에 순차적으로 들어온 팀의 소개를 이었다.


10km 릴레이 대회를 우연히 알게 됐다. 작년 나는 온라인 기반의 동갑내기 달리기 모임에 가입했다. 전국 각지의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달리기를 갓 시작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이미 고수의 반열에 오른 선수급 친구들도 있었다. 어느 지역 체육회에서 일하는 친구가 이 대회를 알려줬다. 그렇다고 금방 네 명이 구성되지는 않았다. 네 명을 모으려면 누군가의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 잘 되는 모임은 어디든 그런 사람이 있다. 마침 한 친구가 두 발 벗고 나섰다. 대회가 안산에 열렸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나도 그 친구의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학창 시절부터 릴레이가 가장 재미있는 종목이라고 생각한 내가 친구의 부탁(?)을 마다할 리 없었다.


조금씩 다리에 힘이 빠졌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꼴찌였지만 꼴찌처럼 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운동장에 떠다니는 온갖 기운을 끌어모아 내 다리와 심장에 밀어 넣었다. 다리가 더 빨라지지는 않았지만 더 늦어지지도 않았다. 심장의 맥박이 터져야 정상이었지만 이 즈음 나는 심장 맥박조차 느끼지 못했다. 무아지경을 향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넷은 지난 3주간 대회를 준비했다. 잘 달리는 사람이 1초를 당기는 것보다 못 달리는 사람이 10초 당기기 것이 훨씬 쉽다. 모두가 팀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런 마음이 한 데 모여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2백 미터만 더 달리면 우리가 얼마나 더 빨라졌을지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인천 월드컵 보조경기장에 모여 함께 연습을 했다. 이전에 없는 달리기를 했다. 우리의 객관적 실력을 알게 됐고 목표도 정했다. 넷 모두 100m를 20초씩 달리면 10km 기록은 33분 20초가 된다. 우리의 목표는 33분, 각자 미치면 32분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능할까?'

100미터를 20초로 달리는 것이 누군가에겐 쉽지만, 누군가에겐 1등이나 꼴찌만큼이나 어렵다. 우리에겐 씨가 빠지게 달릴 때 가능한 수치였다. 100미터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10km를 완주해야 했으니까. 1번 주자는 8백 미터 1번, 4백 미터 네 번, 나머지 2, 3, 4번 주자는 4백 미터를 5번씩 달려야 했다.


2백 미터를 지나 3백 미터를 향해 달릴 때 대회 관계자와 나머지 선수들은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장내 아나운서도 나에 대해 말했다. "팀명이 <**말띠 마라톤>이라 정말 말처럼 잘 달릴 줄 알았는데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안타깝네요."

그건 응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응원했다. 나의 다리는 달려온 2백 미터보다 훨씬 빨리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최선을 다한 꼴찌로 결승선에 들어가고 싶었다.


1등을 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꼴찌를 했다는 사람은 드물다. 꼴찌 하기란 1등 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학창 시절 나는 운동은 잘하는 편이었고 미술과 음악은 바닥을 헤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꼴찌는 쉽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도 꼴찌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나는 군대에 들어가서 나오고 입사를 하고 꽤 오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꼴찌는 하지 못했다.


그 어려운 꼴찌를 막 하려는 참이었다. 이제 1백 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내 안에 남은 모든 힘을 쏟아 다리에 밀었다.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을 만큼 속도가 빨라졌다. 그제야 장내 아나운서는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나를 응원했다. "말띠 마라톤 주자 정말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드디어 골인지점에 들어왔다. 그 어렵다는 꼴찌를 해냈다.  골인지점을 통과하면서 본 기록은 우리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내가 막 경기장에 벗어나자 지난 3주간 함께 달린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물을 주고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는 말과 격려를 퍼부었다. 꼴찌였지만 꼴찌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치 우승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기록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함께 만든 기록은 10km 31분 45초였다. 모두가 미치면 32분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15초나 더 빨랐다.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데 꼴찌라니, 말이 돼?"


그랬다. 우리는 아마추어 러너였고 우리와 함께 달린 다른 팀 선수들은 준 프로였다. 애초에 기록으로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장렬하게 깨지며 멋지게 전사했다. 순위에선 꼴찌였지만, 기록으로는 영광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뿌듯한 꼴찌라면 언제든, 만백 번도 더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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