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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Apr 07. 2021

마음에도 노크를

차선을 바꿀 때는 깜빡이를 켜는 것처럼!

어린 딸이 십 대 소녀가 되면서 새로 생긴 습관이 있다. 딸 방에 들어가기 전에 방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거다. 한 번은 똑똑 두드리고 들어갔는데도 화들짝 놀라 "아빠!"라고 외치며 토끼 눈을 뜨는 딸을 마주했다. 그때 이후로는 "아빠 들어간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서로 민망한 상황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작년에 달리기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동갑내기 밴드에 가입했다. 응원하고 공감하며 서로에게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동갑내기'라는 특별한 매력 덕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들에겐 오래전에 만난 동창 친구들 같은 구수함과 편안함이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달랐다. 다른 모든 온 오프라인 모임은 처음 오는 사람을 공손한 말투로 맞이하는데 이 모임은 시작부터 반말로 환영했다. 처음에는 '이건 뭐지?' 했지만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반색에 어색함은 방귀 냄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든 친구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을 대하듯 글을 쓰고 댓글을 단다. 아주 빠른 시간에 친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준비되지 않은 글에 문제가 생길 때도 있다.

며칠 전 밴드의 운영진 단톡방에 친구의 글이 올라왔다. "친구들 문제가 생겼어." 댓글을 캡처한 사진이 따라 올라왔다. 밴드에서 스쿼트 챌린지를 진행 중인데 거기에 달린 댓글이 문제였다.

"똑바로 안 하고 왜 쪼개ㅋ"

친한 사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처음 본 사람에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글이었다.


자동차로 따지면 깜빡이도 없이 들어간 상황이다.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자동차에 기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무런 문제 없이 태연한 사람도 있다. 50kg의 가녀린 사람은 작은 회오리바람에도 몸이 들썩이지만 100kg의 거구는 태풍에도 끄떡없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인마'나 '녀석'에도 상처를 받지만 거친 사람은 '새끼'나 '짜식'에도 끄떡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부터 공동 리더를 맡은 내가 앞으로 주의하자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로 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글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때가 있으니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한 글은 쓰지 말자. 누군가에겐 '인마'가 아무 문제가 안되지만,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칼이 될 수도 있다. 칭찬과 격려, 응원의 글을 쓰자. 또,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감성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더라. 우리에겐 여전히 소년 소녀의 감성이 있을 수 있으니, 서로 그 감성을 존중하자."


그 글을 쓴 다음날 아침에 "똑바로 안 하고 왜 쪼개ㅋ"라는 댓글로 문제를 일으킨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처음부터 반말을 해서 별생각 없이 글을 올렸는데, 앞으로 조심할게."

물론 사전에 운영진 중에 해결사 역할을 하는 친구가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늘 고상한 글을 쓰는데, 해결사 역할을 맡은 친구는 늘 하기 싫은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참 고마운 친구다. 내가 그 친구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인생관이 같아서다.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좋아하는 거 하며 사는 게 인생이지."

아주 단순하지만 누구나 탐내는 인생이다.


친구의 훈훈한 댓글을 단톡방에 공유했다. 친구들의 반응이 이어졌다.

"오오, 굿굿, 와우, 다행, 잘 됐어."

문제가 아주 잘 해결됐다며 여섯 명의 운영진들은 자축했다. 서로의 공을 치하하며 웃었다.

하루가 더 지났다. 다시 카톡에 글이 올라왔다.

"친구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


상처를 받은 친구가 아직 마음을 풀지 못했다는 거다. 꽤 여린 친구인 모양이다. 나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친구는 어느 중학교의 육상부 코치다. 늘 씩씩한 모습을 보여 철인왕후 정도 되나 생각했는데 여리디 여린 선화공주였다. 다시 설거지를 전담하는 친구가 나섰다. 본인이 양측에 전화해서 해결한다고 했다.

잠시 해결사 친구의 글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상처 받은 00이가 직접 연락해서 해결하겠데." 중간에서 말을 전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 와중에 다시 카톡이 올라왔다.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문제가 될 만한 글이다. 운영진 친구들은 한숨을 내쉬며 예의 주시해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잠시 뒤 일한다고 문제의 글을 못 본 친구가 뒤늦게 글을 올렸다. "친구들, 이건 우리가 게시판에 글 올리기 전에 올린 글이잖아. 괜찮아. 그 뒤로는 나아졌어." 다들 다행이라며 불안한 그림자를 거뒀다.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일요일 세종 울트라마라톤 대회에서 100km를 완주한 친구가 후기를 올렸다. 그 글을 보면 누구나 댓글을 달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샤방샤방 웃는 모습으로 출발한 친구가 100km 결승선에 들어올 때는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친구가 처음 기록 사진을 올렸을 때 "다른 건 모르겠고 참가한 선수 중에 미모는 1등 일 거야"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건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확실히 미스코리아 진이라서 그렇다. 그 친구는 남자가 아닌 여자며 '100km가 뭐야? 1km는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똑바로 안 하고 왜 쪼개"로 문제를 일으킨 친구가 단 댓글은 이렇다. "16시간이라는 시간을 달릴 수 있는 멘탈에 아낌없는 박수를 짝짝짝, 친구 고생했어 엄지 척" 그 글을 보는 내 얼굴에 미소가 춤췄다. 그 글을 캡처해 운영진 단톡방에 공유했다. 보이지 않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덧붙여 들어온 좋은 소식.

"당사자가 간 해결 원칙을 주장한 선화공주의 의도대로 둘은 훈훈하게 이해하고 사과했어." 둘이 처녀 총각이었다면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와 서동이 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부남 부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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