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힘이 남아돌아 아침에 달리고 오후에 또 달리고 밤에는 또 다른 종목으로 달릴 때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밤에는 무슨 종목으로 달렸을까 궁금한 독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혹시 에로에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면 얼른 날개를 거두라. 술로 달렸을 뿐이니까. 허망해도 어쩔 수 없다. 독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갓 달리기에 입문했을 때다. 나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이 바닥 용어로 그들은 서브 3(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달리는 사람) 주자라고 불렸는데, 런린이(초보 러너)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과 밥이나 술이라도 한잔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언제나 옆이나 앞에 엉덩이부터 밀어 넣었고 귀는 최대한 그들의 입 근처에 갖다 댔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주옥같았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들이 알려준 대로 달렸다.
시간은 나를 잘 달리는 주자로 만들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흘린 땀을 물통에 담았다면 소 한두 마리는 거뜬히 키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력을 쌓으려면 대체로 피땀을 흘려야 하나 다행히 달리기는 격투기가 아니어서 피는 흘리지 않았다. 가끔 코피를 흘린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에로에로한 상상은 거두길 바란다. 단지 어릴 때부터 코가 약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내가 서브 3 실력에 근접했을 때 서브 3 주자는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 실력과 그들의 실력이 백지장 한 장쯤 차이 났을 때 선망은 돌연 질투로 바뀌었다. 그들의 주옥같은 말은 한순간에 조옥 같아졌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먹이를 찾는 매가 됐다. 그들의 자세와 달리기 이론에서 실수라도 하나 발견하는 날에는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에 어깨가 이 삼 센티는 올라갔다.
하지만, 그들과 달릴 때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바빴고 그들과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는커녕 도리어 고무줄 늘어나듯 멀어졌다. 그러다 가끔은 끊어진 고무줄처럼 더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앞에서 사라질 뿐이었다. 다행히 가랑이가 찢어지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가랑이와 장거리 달리기는 별 상관관계가 없었던 까닭이다. 100미터 달리기였다면 분명히 가랑이가 쌍둥이로 찢어졌을 것이다. 한 번은 잘 달리는 놈 따라가느라, 또 한 번은 찢어진 가랑이를 봉합하는데 돈 대느라.
달리기로 잘 나가는 유튜버 친구가 있다. 지인이 유튜버로 대성하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로마네 콩티 한 잔이다. 좋은 로마네 꽁띠는 한 병에 이 천만 원쯤 한다는데, 나의 근로소득으로 그걸 마시려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대참사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하루빨리 그가 성공해서 한 잔 사는 것이 로마네 콩티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달리기 친구는 유튜버 중에서 유독 나 홀로 독주 중인데, 문제는 다른 달리기 유튜버들의 은근한 시샘을 받는다는 데 있다. 처음 유튜버를 시작했을 때 그는 주위의 질투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렇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구독자와 그들의 입소문이다. 그가 다른 유튜버의 시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루빨리 백만 유튜버가 되어 다른 유튜버들의 넘사벽이 되거나 스스로 나태해져 다른 유튜버가 그를 추월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을 질투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선망할지언정 시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주택자는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이를 질투하고 한 채를 가진 자는 두 채를 가진 사람을 질투한다. 질투를 한다 해서 나쁜 놈 되는 건 아니다. 나보다 조금 잘난 놈을 질투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니까.
첫 서브 3를 도전하고 아쉽게 실패했을 때 질투심은 휘발유를 끼얹은 듯 불탔다. 조금 더 그 시기가 길었다면 질투가 나를 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나는 한 해 뒤에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서브 3를 달성했다. 서브 3 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었던 서브 3 주자가 우리가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제야 불타오르던 질투심은 소화기를 뿌린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작년에 서울 둘레길을 달릴 때다. 관악산 등산이 아니었다면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서울대학교를 만났다. 서울대학교 정문을 바라본 순간 우리나라에도 이런 좋은 대학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제 막 구구단을 외기 시작한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그 순간 꿈에서조차 우리 대학인 적이 없었던 서울대학교가 우리 대학교가 됐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남이 우리가 되는 순간 시기심, 질투, 시샘과 같은 단어들은 자리할 틈이 없어진다는 것을.
달리기를 하느라 아무것도 못 했을 때, 나보다 더 잘 달리는 누군가를 향한 하염없는 질투심을 쏟아내고 있을 때, 내 안에는 열등감으로 가득했다. 그들이 나보다 실력이 낫다는 것을 인정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건 처녀귀신이 총각귀신을 못 본체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그들보다 술도 잘 마시고 자전거도 잘 탔는데, 그런 우월한 능력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열등감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들을 이기거나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래야 남이었던 그들이 우리가 되니까.
시샘, 질투, 시기 같은 나쁜 감정은 분명히 나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기도 했지만, 나를 더 빨리 달리게 한 힘이 되기도 했다. 시커먼 감정을 태우며 나는 좀 더 잘 달리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욱더 시커먼 감정을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더 활활 태워 하루빨리 실력을 올리면 된다.
세월이 십 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나는 아침에 달리고 밤에 달린다. 이제 독자들도 에로에로한 상상을 할 때가 됐다. 그런데 어쩌나, 달리기를 십 년쯤 했더니 누군가를 시기할 힘도 없지만 에로에로를 할 힘도 없어졌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조차 모르겠다. 독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그것도 다 힘이 있을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