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들을 때가 있다. 심할 때는 내가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일 때는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외면하지만, 친한 사이일 때는 눈을 반짝이며 물어본다. 친한 사이엔 굳이 부끄러워하거나 체면 차릴 이유가 없으니까.
본캐와 부캐를 친하지 않은 남들에게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본캐는 들어본 바 없고 부캐(부캐나 부케나 들을 때는 같다.)는 결혼식 때 신부가 던지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본캐 부캐에 대해 떠들어 댈 때는 굳이 관심을 갖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한 사람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본캐 부캐가 뭐야?"
오래 전의 일도 아니다. 작년 말 친한 후배를 통해 '본캐는 원래 캐릭터, 부캐는 새로운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정작 용어는 알지 못했던 거다. 무엇이든 간단하고 직관적인 용어를 만들어 내는 MZ 세대의 신통방통한 능력에 감탄했다.
일반인이 봤을 때 약간은 보수적인 직장에 다니는 나는 직장인이 본캐다. 그런데, 달릴 때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된다. 진지함과 고리타분함은 훌러덩 벗어버리고 타이즈에 티셔츠 하나 달랑 입고 달리는 나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내가 된다. 그것이 러너를 부캐로 쓰는 내 모습이다. 다행히 내 경우엔 부캐가 본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본캐에 기대하는 바가 크거나 본캐와 부캐가 조화롭지 않게 느껴질 때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들은 부캐를 쓰는 누군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누군가의 눈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부캐를 드러내지 못한다. 부캐 자체가 아주 훌륭할지라도.
주말에는 가능하면 낯선 곳에서 달리려고 한다. 여행 같은 분위기를 느끼면 금상첨화다.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라면 금금상에 첨화화다. 주말을 맞아 마침 그럴 기회가 찾아왔다. 이른 새벽에 집에서 출발해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내 마음을 읽은 듯 차동차의 방귀소리도 힘차고 설렜다. 만날 친구 중 한 명은 마흔이 넘어 만난 동갑내기다.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여리여리한 몸매와 앳된 얼굴에 미소만 한가득이었다. 체력장을 빼면 달리기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과장하면 숨쉬기 운동만 열심히 했을 법한 분위기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최근 바디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은 늘 어정쩡한 옷을 입은 모습뿐이었다.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통 판단하기 힘든 란제리룩이나 비키니룩은커녕 배꼽조차 꽁꽁 숨긴 사진만 올릴 뿐이었다. "바프 사진은 도대체 언제 올릴 거야?"
"난 그렇게 못해......"
그녀의 주위에는 망나니가 춤을 추듯 선생님의 역할을 강요하는 수많은 눈들이 번쩍인다고 했다. 자유롭게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예쁜 몸매를 드러내는 건 선생님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본심일 것이다. 그녀는 학교에선 선생님답게 가정에선 엄마답게 달리기를 할 때는 러너답게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남들의 시선처럼 부캐는 본캐에 악영향을 미칠까?
달리기를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와 비슷하게 나도 직장만 이야기하면 아무도 달리는 삶을 살 거라 상상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열심히 할 때는 내가 어느 직장에서 펜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 달리기를 하며 만난 사람에게 독서를 즐기고 글 쓰는 작가라고 소개하면 놀란 토끼 눈을 감추거나 구라를 쳐도 적당히 치라고 나무란다. 참으로 답답하다. 직장에서 펜으로 일하는 나도 나고,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 나도 나고, 독서를 즐기고 글 쓰는 나도 당연히 나다.
사람들과 어울려 달리기를 하고 기분 좋아 술이라도 한잔하며 떠들다 보면 나는 어느새 에너지로 가득 찬 에너자이저가 된다. 그 힘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목구멍에 기름칠도 한다. 반대로 혼자 달리며 명상을 하거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면서도 에너지를 채우고 쌓인 마음의 쓰레기를 쓸어 낸다. 심리 전문가들은 누군가를 만나 에너지를 채우는 성향을 외향성이라 하고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으로 힘을 채우는 성향을 내향성이라고 말한다. 외향성도 내 안에 내향성도 내 안에 있다. 마치 자웅동체처럼.
바디프로필을 찍고 예쁜 몸매를 드러내는 달리기 친구, 아이들의 멋진 선생님이라고 다를까? 그녀가 들려준 초등학생 아이들의 일상은 더할 수 없이 귀여웠고, 그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 그녀는 누구보다 멋진 선생님이었다.
90년대 생들은 왜 여자를 우대해야 되냐고 묻지만,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을 겪어본 40대 이상 남자는 여자를 약자라고 느낀다. 부채의식이 있어서다.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나 장남을 위해 희생하는 누나, 그것도 아니면 그런 상황을 겪는 친구가 주위에 꼭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인 나는 누구보다 먼저 올림픽공원에 도착했고 나 다음으로 도착한 친구도 여지없이 남자였다. 부리부리한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잘생긴 프레디 머큐리처럼 느껴졌다. 젊은 시절에는 뭇 여인네들을 숱하게 울렸을 것 같은.
곧이어 부캐가 러너인 친구 둘이 잇달아 나타났다. 아랍에서 온 것 같은 부리부리한 친구는 처음 만나는 사이라 서로 통성명을 하고 만발한 개나리와 성질 급한 벚꽃이 부르는 올림픽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미리 달린 까닭에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벗어 주차장으로 갔다. 그 찰나의 순간에 친구들은 이 백여 미터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어제 20km 트레일 러닝을 했다는 본캐 선생님은 아직 피로가 덜 풀렸는지 조금 뒤에 쳐져 있었다. 검은색 타이즈와 티셔츠를 입고 샤방한 운동화를 신은 모습은 건강한 찐 러너였다. 하지만, 정장이나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면 천상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2백 미터를 따라잡느라 빨리 뛴 이유로 뒤에 쳐진 그녀 옆에서 천천히 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시간 동안 함께 달리며 선생님으로만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과 어쩔 수 없는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부캐를 사랑했다. 달리기가 주는 에너지를 좋아했고 그 힘을 다시 아이들에게 준다고 했다. 가끔 달리다 학부모와 다른 선생님을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새로 옮긴 학교에 달리기를 부캐로 쓰는 선생님들도 있다고 했다. 그녀가 그들과 어울리며 슬기로운 본캐 부캐 생활을 이어가기를 응원했다.
까면 깔수록 새로운 면이 드러나는 사람에게 나는 호감을 느낀다. 까도 까도 끊임없이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양파 같은 사람, 다양한 캐릭터가 공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더 멋지더라.
올림픽 공원에서 양파 같은 친구들과 여행처럼 달리며 에너지를 가득 채웠다. 우린 1시간을 달리고 평화의 광장에 모였다. 부캐의 역할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러너로 만난 우리는 헤어져 각자의 본캐로 돌아갔다. 낯선 누군가가 보면 전혀 달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