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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Feb 16. 2023

수분의 시간

딸기 수플레 케이크

수분이 많은 수플레 케이크. 포크로 케이크를 가르면 사르륵,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혀의 감촉에 단번에 녹아 사라지는, 살아지는 케이크. 치즈케이크와 식감이 다소 비슷하지만 치즈케이크가 겨울에 내린 비라면, 수플레 케이크는 여름에 내린 비에 가깝다. 차갑게 뭉그러지는 식감의 치즈케이크와 달리 겨울비의 묵직한 고독이 느껴지던 케이크. 흩날리는 가루가 하나의 반죽이 되기까지 그의 시간에는 얼마 큼의 수분이 있었을까.


한때 내게도 수분의 시간이 있었다. 평범과 부산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다치고 넘어지던 날들. 쉽게 흩어지고 풀어지며 결국 녹아 없어지는, 내가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다치던 엉겁결의 시간들이었다. 수분의 시간을 살았을 때 나는 주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밤 산책을 오래 했다. 천천히도 걷다가 보폭을 빠르게 바꾸어 전봇대와 가로등에 빨리 도달하려 하기도 하고, 먼발치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을 오롯이 응시하며 주머니 속 손을 매만지며 축축이 걸었다. 당시의 나는 강물처럼 여유롭지도, 바람처럼 자유롭지도 않았지만 쉽게 흘렀고 어떻게든 방황하였다. 연민을 가장한 방황이었다. 그렇게 생각 없이 걷다가도 길고양이들을 마주치면 쪼그려 앉아 잠시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그러다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 내고.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지났다.


카페 사장님은 케이크의 사르륵 소리를 ‘수분 터지는 소리’라고 표현하신다. 왠지 집중해서 듣게 되는 그 소리. 찢긴 종이 조각처럼 널브러진 습기들이 단단히 뭉쳐 크게 내뱉는 소리. 한숨과 울음, 모서리의 절망과 후회. 오래된 일들로만 뭉친 기억들. 시간의 궤적으로 쌓인 수분의 모양들. 나는 지금에서야 그것들을 아주 달콤하게 먹을 수 있었다. 종종 딸기 콤포트가 씹힌다. 수분의 시간에서도 굳게 남아 있던 어떤 종류의 다짐과 약속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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