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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 Dec 30. 2019

태풍과 보낸 세부(?) 크리스마스 여행

목적지는 '보라카이'였는데, 여긴 어디???

요즘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은 '여행'을 주제로 하는 것들이 많다.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멍 때리다가 '보라카이'를 여행 다녀온 것을 보고 친구 몇몇을 꼬드겨 크리스마스 여행을 계획했다. 7월 말 경에 예약을 미리 하는 거였는데도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날인지라 그 역시 비행기 값이 평상시의 2배, 호텔비도 약 30% 정도 비쌌다. 그래도 1년을 열심히 살아낸 스스로에 대한 상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질렀다. 그리고는 기약 없이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출발이다!

여행 전날, 짐을 싼다. 비행기 값 아낀다고 화물은 구매하지 않았다. 7킬로에 맞추느라 정말 필요한 것만 넣었다. 무의식적으로 날씨를 확인한다. 앱으로 날씨를 확인하니 비 온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저 동남아에서 흔한 하루 한번 소나기 오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넘겼다.

그리고 이른 아침 비행기라 잠을 청한다. 잠이 올리 없다. 보라카이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상상하니 설레는 것도 있겠지만,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에 더욱 설렌다.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보며, 백사장의 선베드에 누워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렇게 흐뭇하다.

계획대로 공항에 도착한다. 보딩까지는 시간이 있는데, 라운지는 아침 7시나 돼야 연다고 한다. 다른 편까지 걸어가느냐, 사지도 않을 물건을 보며 몇십 분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리번거리기로 한다. 수화물도 구매하지 않았는데, 기내식을 구매했을 리 만무하다. 라운지에서 배를 채워야 한다. 점심은 현지에서 먹는 걸로~

줄을 서서 라운지에 입성해서 보딩 스케줄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새벽 6시 10분에 보라카이로 가는 타 항공사의 비행기는 점심 12시 정도로 연착이 된 것으로 스크린에 보인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다른 항공사 역시 10시 정도로 연착이 된다고 한다.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다음이 내가 타는 비행기인데, 시간이 다 돼도 게이트로 가란 공지가 안 뜬다. 담당자에게 확인 요청하니 계획대로 뜬다며 게이트로 가라고 한다. 먹던 것을 빠르게 정리하고 열심히 뛰어서 게이트에 도착한다. 정말 지연의 표시는 없고, 계획대로 비행기가 뜬다고 했고, 정말 제시간에 떴다.


그때만 해도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도 못 했다.


4시간 여를 날아서 목적지인 보라카이 칼리보 공항에 다다를 때가 되었다. 하강한다는 방송은 아까 했는데, 다급한 기장의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나온다.

칼리보 관제탑에서 답변이 오지 않아,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세부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태풍으로 인해 칼리보 공항이 피해를 입어 폐쇄되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긴 어디?

엥? 뭔 소리? 내가 알아듣는 저 영어 방송의 내용이 정령 맞는 말인가 의심했다. 영화나 드라마 말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태풍이 오고 있었단 말인가? 어제 본 그 앱의 비가 온다는 것이 바로 태풍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겨우 기억해 낸다. 한국말로 다시 방송을 해주지 않으니 정말 맞는지 모두들 반신반의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태풍의 눈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말 정확히 40분을 날아 세부 공항에 착륙했다. 뭔가 부산스러운데 내리라는 말도, 어떻게 하라는 방송도 없다. 그저 앉아서 다음 공지를 기다리라는 말 밖에... 약 20~30분 후 비행기에 내려서 17번 게이트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기상상황을 보고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왼쪽) 세부 막탄 공항에 착륙하고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승객들  (오른쪽) 비행기에서 내려 게이트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


현지 유심을 사려고 로밍을 해오지도 않았다. 칼리보 공항에서 내려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항구에서 페리를 20여분 타고 들어가야 보라카이 섬이 나온다고 해서, 안 하던 픽업 서비스도 신청했었다. 그런데 이미 시간은 지나있고, 인터넷도 안되니 너무 갑갑한 상황에 직면한다. 나 같은 승객이 약 180여 명. 가족단위도 있고, 친구들이랑 온 그룹도 있고 다양하다. 최대한 선해 보이고, 가족단위로 온 분께 데이터 동냥을 한다. 흔쾌히 인터넷 도시락 비번을 알려주신다. 그렇게 얻은 데이터로 태풍을 검색하고, 보라카이의 상황을 검색한다. 이미 24일부터 태풍 판폰은 보라카이를 강타했고, 공항은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다. 망연자실... 우리, 여행을 계속할 수는 있을까?

빌린 데이터로 급하게 호텔에 메시지를 보낸다. 픽업 서비스에도 연락을 한다.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취소하고, 환불 여부를 묻는 내용을 고객센터에 올린다. 점심으로 크래커 몇 개와 물을 받고, 게이트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오늘은 비행기가 못 뜬다는 소식을 전해 받는데, 기상상황에 따라 내일이나 공항이 다시 오픈되면 알려주겠다며 항공사가 제공해주는 호텔로 가라고 한다.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우왕좌왕하는 분위기 속에 항공사가 제공해주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5시간이 걸렸다. 1시에 착륙했는데, 6시가 돼서야 호텔에 도착해서 또다시 기다림이 시작된다. 치킨 한 조각과 주먹밥 하나, 물 한병 주고 방 배정을 기다린다. 겨우 방을 배정받고, 짐을 푼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


무색하게도 화창한 날씨의 세부 막탄 공항 전경


(왼쪽) 우리를 호텔까지 실어나른 버스 (가운데) 우리가 묵었던 호텔/시설은 나쁘지 않았다 (오른쪽) 늦은점심, 저녁 전 간식으로 준 치킨과 주먹밥 하나


내가 이 상황이 될 줄이야?

이런 뉴스를 접할 때, '비가 그렇게 오는데 왜 거길 갔어?', '미리 확인도 안 하나 보지?', '아~ 정말 왜 그럴까?' 이렇게 생각해 왔다. 비가 그렇게 오는 줄 몰랐다. 항공사도 출발 그 시각까지 그 어느 공지도 해주지 않았다. 그룹의 다른 분께 들으니 여행사 역시, 변경이 없고 출발한다고 했다고 한다. 안 가면 환불도 불가하다고 했다 하니 다들 께름칙하지만 출발한 모양이다. 정말 몰랐다. 진짜 아무도 안 알려줬다. 나중에 다른 뉴스를 보니 비행기 안에서 7시간이나 갇힌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린 행운이어야 하는 건가?


선베드에서 별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평생 처음으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고 싶었을 뿐이다. 1년 동안 열심히 버텨온 내게 상을 주려던 것뿐인데, 이젠 한국으로 갈 비행기가 있을지 고민하는 난민 신세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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