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는 시대에 대하여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이 진실이 되는 시대다.
넷플리스 영화〈굿 뉴스〉는 여기서 출발한다.
영화의 첫 장면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트루먼 셰이디-
그러나 영화 막바지에 이 내레이션은 뒤집힌다.
'트루먼 셰이디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 그럼 트루먼 셰이디가 누구냐고? 알게 뭐야. 그냥 아무개지.'
진실의 주체조차 실존하지 않았던 셈이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이 문장은, 시청자를 되돌아보게 한다.
“당신이 믿는 건, 당신이 믿고 싶은 사실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1970년대, 한 항공기 납치 사건이 벌어진다.
이 같은 사건을 두 나라는 전혀 다르게 기록한다.
한쪽(한국)은 침묵했고, 다른 쪽(일본)은 영웅을 세웠다.
위 장면에서 알 수 있듯, 뉴스는 편집의 결과다.
팩트는 동일했지만, 진실의 방향은 달랐다.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남기고, 감추고 싶은 순간은 삭제된다.
국민은 그 잘려나간 장면 속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불편한 사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결국 진실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것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려는 의지, 그게 진실을 향한 첫 걸음이다.
그리고
본질을 읽는 감각, 그게 결국 사람이 서게 되는 자리를 바꾼다.
서고명 중위(홍경 분)와 ‘아무개'(설경구 분).
두 사람은 같은 작전에 참여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더 나은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움직였다.
서 중위는 이름도 없는 '아무개'를 얕봤지만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기록되지 않았다.
극 중에서 박상현 중앙정보부장(류승범 분)의 명령에 따라 서 중위와 '아무개'는 움직였고, 둘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한국이 사건을 해결했지만, 미국의 외교적 판단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남한의 보도는 금지됐고, 일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고와 선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못했을 뿐, 그 침묵에도 진실은 남아 있었다.
"누가 꼭 이름을 불러줘야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꼭 알아줘야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야. 네가 한 일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어."
통찰이란, 보이는 장면에'만' 머물지 않고 그 이면의 맥락까지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단정하기 보다, 그 선택이 만들어진 배경을 보는 시선 말이다.
"우리는 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만 본다."
(바로 위의 포스터 사진 역시 이를 가리키고 있다.)
<굿 뉴스>는 ‘좋은 뉴스’가 아니다.
‘좋은 눈’, 더 정확히는 '본질을 볼 줄 아는 시선'을 의미한다.
정보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뉴스보다 유튜브와 SNS의 말을 더 쉽게 믿는다.
진실을 구별한다는 건
정보를 더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전체를 보는 감각이다.
부분만 보는 이들은 결국, 사실만 소비하다 진실을 놓친다. 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한 장면만 잘라보자.
개가 사람을 공격해 인간이 방어하다 개를 쳤다고 하자. SNS엔 ‘사람이 개를 때렸다’는 사실만 올라온다. 그렇게 앞뒤 맥락을 포함한 진실을 모른 채, 당사자를 공격한다.
이같이 진실은 전체를 보고 판단할 때 드러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건, 그 앞뒤의 시간이다.
"일어나는 사실, 약간의 창의력, 믿으려는 의지, 이 세가지가 잘 합쳐지면...(여론은 조작되고 사람들은 이를 쉽게 믿는다)"
-영화 <굿 뉴스> 中-
보도는 남는다.
그러나 화면 밖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있다.
기록되지 않은 표정, 인터뷰 전의 망설임,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어진 선택들.
진실은 그 담지 못한 것들까지 품은, 더 넓은 이야기다.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는 부분만 믿지만, 진실은 그 바깥의 맥락 속에 있다.
부분을 보는 사회.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속 ‘아무개’처럼.
그러나 본질은 진실 속에 있다.
본질을 보지 못하면, 세상의 표면에 속한다.
통찰은 수많은 사실 속에서 본질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 안에서 흐름을 타되 자기 시선을 지켜 의미 있는 길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본질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안다, '아무개'의 다음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말은, 진실이 사라져도 본질은 남는다는 걸 의미한다.
* 보이는 것 그대로 믿고 있진 않나요? 혹은 통찰을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시나요?
-> 본질을 파악하는 힘을 함께 훈련하는 자리, <통찰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