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브샤브
주입식 이미지(!) 인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인의 밥상'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보글보글 뚝배기에서 맛있게 끓는 광경 같은 거다. 온기가 없는 음식들, 이를테면 샐러드라거나 냉면 같은 것들은 맛있다는 확신은 있을지언정 누군가가 '정이 느껴지는가'라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친구가 놀러 왔다. 자기 남편과 꼭 닮은 첫째 아들을 데리고서.
스무 살 새내기 때 처음 만난 친구는 나와 정말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로 술 마시고 놀러 다니던 나와 달리,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올레TV랑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집순이였다. 내가 공부는 더 이상 하기 싫다며 칼졸업하고 취업했을 때 친구는 로스쿨에 진학하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가방끈을 늘렸다. 그리고, 고양이 셋을 모시며 딩크를 선언한 나와 달리 친구는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우리의 삶에 접점이 있기는 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다른 삶.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마시는 와인에 비슷한 고민을 담는다. (꽤나 무거운 고민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도 있다. 예컨대 "일 안 하고 부자 될 순 없냐" 같은 헛소리도 있다.) 함께 먹는 밥에서 각자 그려가던 인생의 접점을 찾는다. 3N 년을 살다 보니 사람 사이라는 것도 노력이 상당히 필요한 일이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아도 어긋난 직선처럼 멀어지더라. 이따금씩 친구와 함께하는 한 끼의 식사가 그 선을 과감히 도 구부려 맞닿게 해 주는 것 같다.
그런 식사 자리에선 당연히 따뜻한 요리가 제격이지! 이왕이면 기분 좋은 소리로 보글보글, 하고 끓어 주면 더 좋고.
세상이 좋아져서 샤브샤브도 배달이 된다. 버섯이랑 소고기랑 육수랑 소스가 야무지게도 포장되어 도착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조카를 위해 일부러 멀티쿠커에 조심스레 세팅을 한다.
숙주는 폭신한 러그처럼 바닥에 소담하게 깔아 준다. 그 위에 갖은 버섯을 예쁘고 반듯하게 세워 담는다. 질감이 비교적 짱짱한 배추는 버섯과 버섯 사이를 가르듯이 넣고, 청경채는 얌체처럼 빈 공간에 쏙, 끼워 준다. 유부랑 파쉬볼까지 남김없이 담고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약불에 보글보글 끓이기 시작하면 손님맞이 준비 끝! 친구가 거의 다 왔다는 카톡을 보내오면 불을 끄고 뚜껑을 덮어 둔다.
아직 어린 조카가 직접 먹을 수 있도록 가벼운 숟가락과 포크를 꺼내고, 물컵 받침도 잊지 않고 준비한다.
마침 여름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빗소리와 보글보글 샤브 끓는 소리가 참 잘 어울렸다. 비 땜에 바깥공기는 서늘한데 우리의 식탁은 날씨 따위 안중에도 없는 양 온기가 넘쳤다. 국물 한 숟갈 떠먹으면 뱃속이 찌르르, 하며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뱃속이 따뜻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여유는 대화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땐 꼭 따뜻한 걸 먹는다. 말 한마디라도 더 좋게, 예쁘게 나오고 밥도 두 배는 더 맛있다. 조금은 오글거리는 칭찬이나 격려의 말도 뱃속의 따뜻함을 무기 삼아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다. 고양이 만지랴, 국자로 죽 만들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내 바빴던 우리 조카도 따뜻한 음식의 소중함을 조금은 느꼈을까 -
참고로 이 날 조카와 놀아주느라 고생한 우리 둘째는 조카가 집에 가자마자 떡실신했다. 육아가 힘든 건 사람이나 고양이나 꼭 같네 -
유난히 스트레스가 몰아치는 한 주를 보내고 나면 주말에는 꼭 따뜻한 국물 요리를 먹는다. 각자 일하느라, 청소하고 운동하고 공부하느라 바빴던 평일에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국물 한 숟갈 먹고 나면 술술 나온다. 남편도 더 귀와 마음을 활짝 열고 세심하게 들어주는 것 같은 느낌은 국물 덕분일까, 아님 주말이라서였을까. (혹은 기분 탓..?)
앞으로도 좋아하는 사람, 위로해 주고 싶은 사람과는 국물을 먹을 거다. 조금 매우면 매운 대로 좋고, 깔끔하고 맑은 국물도 좋다. 국물 한 숟갈 먹여서 긴장을 풀어버린 다음에 고민이 술술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러면 국물보다 더 따뜻한 위로로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