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지그라탱
아빠가 가지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꽤나 고역이었다. 씹을 때 흐물흐물하고 물컹거리는 불쾌한 식감에, 베어 물면 물기가 나오며 입 안이 축축해지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가지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하는 엄마에게 도대체 몸에 안 좋은 건 뭐야? 라고 물어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어릴 때까지 갈 것도 없이 20대까지만 돌아가도 나는 가지를 싫어했다. 이자카야에서 먹는 모찌리 도후, 아웃백에서 먹는 투움바 파스타, 냄새에 끌려 사 먹게 되는 로띠보이 번까지 - 가지가 아니어도 맛있는 게 참 많았으니까. 굳이 흐물흐물 축축한 가지를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근데 어느 순간 좋아졌다. 그냥 나이 들고 보니 좋아졌다. 부드럽고 촉촉하잖아! 얼마나 좋아!
물론, 내가 20대 때 몰랐던 것이 '가지 맛' 뿐만은 아니다.
대학 새내기 때 만났던 친구. 전공이 다른데도 드넓은 캠퍼스에서 굳이 굳이 매일 만나 밥 먹을 정도로 친했다. 여름이면 계곡에, 겨울에는 양떼 목장엘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놀러도 많이 갔었다. 눈에 띄게 청순하고 예뻤던 친구는 인기가 무지 많았고, 나를 통해 들어오는 소개팅 요청만 한 주에 열 건이 넘었던 것 같다. 고르고 골라 정말 괜찮은 녀석들만 몇 명 연결해 주었었는데 결국 그중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던 한 새끼... 아니, 남자애와 친구가 사귀게 되었다.
그 커플이 1년 정도 만났을 때였나, 문제의 어리숙맨이 바람을 피운다는 제보를 전해 들었다. (증거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 일에, 특히 연애사에는 절대 끼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할 수 있는 건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은근슬쩍 떠 보는 게 다였다. 걔, 여자 문제는 없어?
그렇게 또 2년 정도가 지났고, 어리숙맨의 바람 커리어도 고스란히 2년 추가되었다. 심지어 같은 상대랑 계속 만나는 게 얼마나 괘씸했던지! 게다가 클럽 죽돌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이제는 나서야만 했다. 친구로서, 그리고 주선자로서의 책임감이 나를 움직였다. 지난 3년간 그의 만행을 한 번에 폭로하던 그날, 나는 이별을 강력히 권해 주었다.
결말은 흔하고 또 뻔했다. 그녀는 일단 그 개새끼와 헤어졌다, 그치만 제보자를 밝히지 말아 달라는 내 요청은 이루어지지 않아 나는 어리숙맨에게 쌍욕을 먹어야 했다. 친구와 어리숙맨은 재회했고,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친구와의 손절을 결심했다.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년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둥이 구남친에게 다시 잡힐 정도로 강단 없던 친구와는 달리, 한 번 손절한 관계는 뒤돌아보지 않는 꼿꼿한 성격 덕분에 나는 친구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뭐, 연인으로 치면 잠수 이별인 셈이지만 이유가 워낙 명백했으니 친구도 알고 있었을 거다. 내 생일을 핑계로 안부를 물어 오던 친구의 문자는 2년 정도 씹었더니 조용해졌다. 다른 친구들을 통해 그 커플이 결혼 준비를 하다 헤어졌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지만, 잘 됐네, 진작 그럴 것이지- 그 이상, 그 이하의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이 흐른 지금. 갑자기 카톡이 왔다. 냐냐야, 잘 지내? 그때 미안했어.
문자 한 통은 순식간에 나를 십 년 전으로 데려다주었다. 어리숙맨에게 쌍욕을 먹던 날, 썩은 동아줄 잡아 보겠다고 나를 팔아버린 친구가 괘씸해서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자기가 훨씬 아까운 줄도 모르고 웬 개자식에게 절절매는 꼴이 영 보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바보짓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또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것들이 내가 친구를 떠난 수십 가지의 이유 중 가장 큰 것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답장이 써졌다. 잘 지낸다고, 다 지난 일이니 괜찮다고. 단언컨대 이 말에는 단 한 줌의 거짓도 없었다. 그 톡을 보고 친구를 용서한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나는 그녀를 용서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남친은 몇 년이나 바람을 폈다지, 일단 찝찝하지만 다시 사귀기는 하는데 그마저도 살얼음 같은 관계였을 테고, 그럴 때마다 고민 털어놓던 친한 친구는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그 사달을 겪으며 가장 충격받고 힘들었을 사람은 그녀였을 거라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나도 어렸지만, 걔도 어렸다. 그럴 수 있다. 나사 빠진 것처럼 굴 수 있다. 어른이 된 나는 그때의 어렸던 친구를 너무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미 십 년이나 공백이 생겨버린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대단한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럼에도 답장을 보냈던 이유는 이제라도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나는 그녀를 충분히 미워했고, 그만큼 아프게 벌주었다. 이제는 그녀가 죄책감이라는 짐을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졌으면 싶었다.
시간은, 꼿꼿하고 날카로웠던 나를 마치 가지처럼 유연하게 만들어주었다. 나이 든다는 건 가지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였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가지가 먹고 싶어졌다. 남편이 동네 산책을 간다기에 오는 길에 가지를 부탁했다. 가지 그라탱을 먹기로 한다.
소금, 후추를 넣고 올리브유에 버무린 가지는 팬에 미리 노릇하게 구워 둔다. 토마토소스와 채 썬 양파도 같이 끓여서 준비한다. 이 때는 버섯이나 다진 고기도 같이 넣고 끓여주면 맛있다.
가지를 바닥에 깔고 양파와 토마토소스를 올린다. 그 위에 치즈 이불 촤르르- 이렇게 두 번 반복하고 200도에 10분 정도를 구웠다. 한 김 식고 나면 식탁으로 강퇴!
입 안에서 씹히는 가지는 더 이상 '흐물흐물'하지 않고 '부들부들'하다. '축축'하지 않고 '촉촉'한 기분이 든다. 좀 강단이 없으면 어떠한가, 자기 형체는 잘 잡으며 최선을 다해 존재하고 있는데. 오늘부로 나는 가지 같은 어른이 될 거다. 적당히 흔들릴 줄 아는 부드러움을 가질 거다. 날 세우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살고 싶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저서에서 나이 듦을 가리켜 '만병통치약'이라 적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친구를 이해한다. 웬만한 일은 다 이해한다. 사소한 일에 행복하고, 남들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즐기며 살 수 있다.
좋다, 나이 드는 거!
친구는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했다. 나는 그래, 다음에 한 번 먹자, 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마 밥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그리고 굳이 밥을 먹지 않으려는 이유도,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배운 것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