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정신 건강 관리 - 2. 프랑스에서 심리 상담을 받은 날의 일기
다음은 프랑스에서 상담을 받고 온 직후에 쓴 일기 중 일부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와 감정 중심의 일기라서 정보는 없으니 스킵 해도 된다.
2019.04.26
상담을 받고 왔다. 새벽 한 시 반부터 네 시 반까지 □□랑 통화를 하다 늦게 자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가지 말까 싶었지만 자꾸 이렇게 피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나갔다. 10시 10분 예약이어서 10시쯤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 있길래 전화를 했더니 아직 도착을 안 했단다. 길에 서서 기다리다 10분이 거의 다 되어서 상담사분이 도착했다. 먼저 우울과 불안이 문제라고 이야기했고, 내게 있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나갔다. 언제 자퇴를 했고 언제 프랑스에 왔고 언제 한국에 갔고... 그리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살면서 덮어두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내 현재 상태의 원인이니까.
어제 하루는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아침에도, 자기 전에도 기분이 괜찮았다. 그건 아마 혼자 잡생각을 할 시간이 없어서였겠지. 12시쯤 일어나서 밥을 먹고(우울에서 벗어나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탄단지 균형을 잘 맞춰서 먹었다) 유튜브를 보면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좀 있다가 씻고 나가서 ○○언니를 만나서 장을 보고 △△언니 집에 가서 요리해 먹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와 씻고 누워서 전화 통화를 세 시간 하고 잤으니까. 어제는 과거에 대한 생각도,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도 딱히 하지 않았다. 역시 우울증은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에 빠져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증상’인 것 같다. 어쨌든 그랬는데 오늘 내게 있었던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해 돌이켜보고 그걸 프랑스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니까 좀 힘들었다. 집에 와서 낮잠을 자다가 악몽도 꿨다.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힘들고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 다행이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던 이유는 내가 지금 힘든 이유를 증명할 수 있어서였다. 그런 일들을 덮어두고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다. 당장 힘들면 잠시 덮어두고, 언젠가 한 번쯤 돌이켜보며 치료해야만 한다.
오늘 마담의 이야기로는 나처럼 좋지 않은 기억들이 얽히고설켜서 축적(accumulé) 된 경우에는 그 기억들을 수리(réparer) 해야 한다고 했다. 그 방법으로 EMDR 치료를 하기로 했다. EMDR 치료가 뭔지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물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힘든 사람의 치료를 예시로 설명하는 영상이 있었다. 그가 부러웠다. 그는 물에 대한 트라우마만 극복하면 되니까.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상처와 트라우마, 우울감으로 얼룩져있다. 이 모든 것들을 눈동자의 움직임을 이용한 치료법으로 고쳐낼 수 있을까. 아니라면 평생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할까. 일단 나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내 인생은 실패작이라는 생각, 그리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하고 운동도 하고 타인에게 기대려 하지 않고 스스로 치료받기 위해 방법을 찾아본 것.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대단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취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계속 다잡고 상담소를 방문한 것.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에게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고 치료받는 게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을 이겨낸 것. 한 달 뒤면 한국에 돌아가서 더 쉽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상담소를 찾은 건 그만큼 힘들었던 거겠지.
오늘 상담을 통해 느낀 건 이거다. 나는 마음의 힘이 약한 상태라서 어느 정도 작은 일도 견디기 힘들어한다. 잘 견디는 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내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고 혼자 일어서서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멋지다. 이 모든 건 어쩌면 남에게 기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려움을 헤쳐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며칠 전 오랜만에 진지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속에서 찾아낸 건, 난 죽고 싶지 않다는 거다. 나는 살고 싶고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힘든 걸 누군가 알아주고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후회하겠지? 미안하다고 생각하겠지? 사람들이 내 우울을 그땐 알아주겠지?라는 이유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니까. 제일 좋은 건 살아있을 때 누군가 내 힘듦을 알아주는 거다. 하지만 여기선 누구나 힘드니까 남에게 기대려 하면 안 된다. 남들에겐 나까지 신경 써줄 여유가 없다. 나조차도 내 우울에 지치는데 남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냥 나 혼자 일어서서 노력하기로 한다. 일단 상담을 받으면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충분히 힘들다는 걸 인정해 준다. 고등학생 때 방문했던 정신과에서도 내가 힘들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받아서 기뻤다. 주변에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어서 그걸 받아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남들을 탓하기보단 그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그래서 정신과나 심리 상담에 대한 인식이 훨씬 좋아져야 한다. 자신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극도로 힘겨워지기 전에 상담소를 방문하는 등 도움을 요청해야 하니까.
일단 내가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절실히 느낀 계기는, 요즘 나의 상태가 4년 전과 비슷하다는 걸 느낀 거다. 소리에 예민해졌고, 갑자기 눈물이 나고, 내 인생은 이미 틀려먹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우울하다는 생각에 갇혀 다른 일을 할 수 없고, 끝없이 불안하고,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잠시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할 새도 없게 만들기 위해 자꾸 휴대폰을 잡거나, 배가 고프지 않은데 뭔가 먹거나, 밖에 나갔다 집에 가는 길에 왠지 모를 공허함에 꼭 무언가 사 가거나...), 잠을 잘 자지 못하고 거의 매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증세는 계속 있었는데 요즘 일주일간의 방학 탓인지 극도로 심해진 것뿐이다. 요즘 내가 스스로를 자꾸 돌아보려고 하고, 한 달 뒤 한국에 돌아갈 생각에 건강하게 살려고 하다 보니 힘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은 좀 듣자. 운동을 하고, 잘 먹고,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고,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도 자주 나가고. 그것만 지키면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일단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