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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ㅇㅈ Sep 18. 2021

8년 전 아일랜드로 떠나며 부치는 편지

프롤로그

2013년 9월 6일. 왼손을 다 접고도 오른손 세 개를 더 접어야 하는 8년 전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더 이상 어리기만 한 나이가 아닌데 이때는 참 어렸었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가 아니었고 한평생 자취란 걸 해보지 않았던 내가 대학교 졸업학기를 앞두고서 덜컥 아일랜드 유학행을 결정했다. 사실 덜컥이라고 하기엔 몇 날 며칠 여러 유학원을 거쳐 밤낮을 고민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충분히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가장 중요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있느냐였다. 아일랜드를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아이슬란드와 헷갈려하고 영국과 다른 나라임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정말로 영어만 쓰면서 지낼 수 있는지 외국인들과 1년이란 시간을 살 수 있냐며 물어왔다.


사실 난 그것보다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떨어져서, 무엇보다 한 뱃속에 태어난 동생과 떨어져 지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물어봤다. 혼자서도 척척인 동생과는 달리, 난 동생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혼자서는 아직 많은 것을 시도조차 못해보는 겁쟁이였으니까. 하다못해 가족과 간 노래방에서 내가 예약한 노래인데도 동생이 같이 노래를 불러주지 않으면 개미 같은 목소리로 겨우 부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 홀로 아일랜드행을 결정한 건 내 마음속 한켠에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잔뜩 엉켜있는 것을 하나씩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독립이 아닌 외국을 택한 것은 고3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 다른 주요 과목들은 평소보다 점수가 잘 나왔는데 영어는 평소보다도 한참 낮은 등급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내 인생 첫 위기였다. 원하는 대학에 족족 떨어지면서 안전빵이라고 생각했던 대학마저 예비번호를 받으면서 영어라는 과목은 나한테 풀지 못한 숙제였다. 나에게 영어는 영문학이었다. 한 번도 한국어처럼 언어로 느끼거나 사람과 나누기 위한 대화의 수단으로 쓴 일이 없었다.


대학에 가서도 비슷했다. 기억해야 할 단어들이 여전히 많았고 내가 지금 듣고 쓰고 말하는 게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시험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내게 영어가 언어라는 느낌이 들었던 일이 있었다. 교양 필수과목이었던 영어는 학기마다 이론과 실기를 모두 다루는 시험을 치렀는데, 필기시험과 랜덤으로 고른 주제에 대하여 외국인 교수님과 1대 1 프리 스피킹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프리 스피킹이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일종의 틀이 필요했고 결국 각 상황을 유추한 스크립트를 써서 달달 외웠다.


혹시 모를 질문들까지 들어올 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갔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내가 건네는 말에 교수님은 내가 준비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습게도 사뭇 이런 게 대화인가 싶었다. 대화라는 건 정답이 없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인데 말이다. 외국인 교수님 중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우리 교수님은 아주 조금 들을 수 있는 정도고 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다.


졸업학기를 앞두고서 많은 학생들이 진로를 고민하게 되듯 나 또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유치원 교사를 꿈꿨기 때문에 휴학 없이 취업하겠노라 결정했다. 초, 중, 고등학교에 대학교까지 같이 왔어도 이제는 서로 갈 길이 분명하게 달랐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니 전부터 마음에 담아둔 영어를 제대로 돌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생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도 고쳐먹고 싶었다. 앞으로 혼자서 결정하고 해내가야 할 일이 무수히 많을 테니 매운 맛보기로 그 전장에 날 홀로 보내는 작전이 떠올랐다.


마음을 먹고 난 다음날 유학원을 찾아 나섰고, 나라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생각한 나라는 캐나다였지만, 마침 워킹홀리데이 접수방식이 바뀌어서 내가 가려는 시기엔 갈 수 없었고 상담을 받으면서 아일랜드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아직 한국 인프라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외곽으로 갈수록 한국인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도 만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외국에 가면 공부보다 언어라는 느낌을 갖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유럽권이다 보니 공부하다가 지치면 옆동네 가듯 비행기로 1시간이면 영국을 오갈 수 있고 유럽여행을 하기도 좋을 거란 말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혼자서는 식당에서 밥도 못 먹어 던킨도너츠를 사서 가방에 넣고 다니던 내가 과연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정녕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혼자 살 수 있을까란 걱정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설렘과 기대감이 더 컸다.


이건 무려 8년 만에 시도하는 나의 제2고향 아일랜드를 되돌아보며, 과거의 나에게 건네주고 싶은 편지다. 결국 그 말은 돌아 돌아 현재의 나에게 돌아오겠지.


아일랜드 홈스테이 도착한 첫 날. 9월 6일 한밤중 떠나 16시간 비행 뒤에도 아일랜드는 이제야 다음날의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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