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길,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발목 잡힌 사건
D-day. 아일랜드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타지에서 1년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짐으로 꾸렸는데도 이민 가방을 꽉 채울 정도로 묵직했고 몸만 한 가방도 하나 멨다. 가족들도 덩달아 분주했다. 오후 비행기였는데도 티켓팅과 수화물 부치는 것을 고려해 일찌감치 공항으로 향했다. 그동안 쌍둥이 동생과 살면서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날이 고작 1박 2일 대학교 MT였는데 1년을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마음이 뒤숭숭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아직 체크인 시간까지 꽤 많이 남아서 한숨 돌리던 차, 꿈에도 예상 못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내가 타려는 항공편이 ‘결항’ 되어버린 것이다. 우선 수속 카운터에 줄을 서면 대체 항공편을 소개해준다는 말에 서둘러 줄을 섰다. 항공편에 따라 더 빨리 출발하거나, 좀 더 늦게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러다 덜컥 한 시간 뒤 아님 바로 수속 준비하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음 2차 어택이 있었으니.
지금 가능한 항공편은 다른 항공사 비행기를 이용해 이스탄불로 경유하는 것뿐이라며, 밤 11시 50분 비행기라는 것이었다. 더 빠른 것도 아니고, 몇 시간 후도 아니고 오늘을 고작 10분 남기고 출발이라니. 밤 11시 50분 비행기면 내일과도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던 나와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허망한 소식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티켓 확인 메일까지 왔는데 오늘 새벽부터 아침까지 연락 한 통 없이 결항 처리라니.
무엇보다 화났던 건 갑작스러운 결항에도 적절한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찾아보니 이 항공의 결항과 부적절한 후속 조치는 예전에도 문제가 됐었다는 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카운터 앞에 결항을 알리는 종이만 딸랑 붙어 있었고, 따져봤자 카운터에는 다른 항공 직원들뿐이라 난감했다. 건네받은 고객센터로 전화해보니 사과의 말보다 “그래서 후속 대체 편 구했냐”식의 대응이 날 더 황당하게 만들었고, 보상을 받으려면 형식에 따라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 수 없이 밤 11시 50분 비행기를 타기로 했고, 엄마와 아빠는 긴 비행이 될 텐데 한밤중 타는 비행기가 오히려 더 잘되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초계획형인 나에게는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변경해야 할 일들부터 눈에 보였다. 다행인 건 유학원을 통해 예약해두어서 홈스테이와 도착하자마자 하기로 했던 투어는 뒤로 미뤄두겠노라 연락을 받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인생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출발 첫날부터 발목을 잡힐 줄이야.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 오시마 노부요리
비행기로 16시간 떨어진 곳에서 혼자서 또 어떤 일을 겪고 헤쳐 나갈지 걱정은 뒤로 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연장된, 한국에서 지낼 수 있는 10시간가량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