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 처음 도착한 건 9월 초 가을이었다. 사실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편은 아니다. 보통이 초가을 날씨고, 겨울이 우기라 비가 많이 왔지만 거의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왔다. 나의 첫 홈스테이는 아이리쉬 엄마 제럴딘과 딸 제시카 그리고 강아지 로시가 살고 있는 더블린 6였다. 학기가 시작하는 일정에 맞춰 오다 보니 내가 지내려는 기간과 집을 내어줄 호스트 가족의 스케쥴도 맞아야 해서 내 선택보다 운에 가까웠다.
더블린 6는 중심부인 더블린 1, 2와 비교적 가까워서 학원까지 걸어 갈 수 있는 거리였고,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의 외곽으로 잡히는 경우도 많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출발해서 15시간 넘는 비행을 하고도 아일랜드는 이제야 출발일 다음 날 아침이었다. 한국은 해가 곧 뉘엿뉘엿 질 시간인데 여기는 이제 하루가 시작되었다니 하루를 번 느낌이 들었다. 아일랜드에 도착했으면서 핸드폰도 나도 아직 모든것을 한국을 기준으로 두고 있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유학원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집까지 오는 길은 과연 나를 조금씩 아일랜드 가까이에 옮겨다 두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지나며 스치는 이들 모두가 외국인이라 내가 진짜 아일랜드에 왔구나 깨닫게 해 주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백발의 제럴딘과 나보다 성숙해 보였던 10대의 제시카는 수줍지만 따듯하게 날 맞이해주었다. 제럴딘은 먼 비행을 했을 나를 꼭 안아주며 집을 간단히 소개해주더니 이만 씻고 푹 쉬라고 해주었다.
내가 지낼 곳은 2층의 가운데 방으로 제럴딘과 제시카 방의 사이였다. 이민 가방을 내려놓고 어깨에 멘 가방까지 스륵 풀고 나니 내 몸도 그제야 스륵 풀렸다. 15시간이 넘는 비행을 한 건 처음이라 우선 개운하게 씻고 싶었다. 세안 용품과 옷가지를 챙겨 들어간 욕실은 물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내가 또 누구인가. 의지의 한국인! 깔끔한 한국인 아닌가. 샤워를 끝내고 옆에 놓인 바닥 걸레로 꼼꼼히 닦아 내고는 흡족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자마자 왼편에는 작은 침대와 옷장이, 그 끝머리에는 거울이 놓여있던 내 방. 한국에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생과 한 방을 썼는데 아일랜드에서 나만의 첫 방이 생겼다. 영원할 공간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정이 훅 들어버릴 것만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좋고 신기한 감정이 편안하단 생각에 이르자 나른해졌다. 비행기에서 잠을 꽤 잤는데도 아무래도 침대가 주는 아늑함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 이내 단잠에 빠져 들었고 제럴딘의 부름이 들리기 전까지 내가 잠든지도 몰랐다. 아일랜드에서 첫 식사는 미트볼 파스타였다. 의자를 식탁 쪽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나도 모르게 "잘 먹.."이라는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것. 제럴딘과 제시카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물었다.
그동안 몇몇의 유학생들이 이 집을 오갔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브라질리언 유학생이 그전에는 중국인 유학생이 지냈다고 했다. 한국인도 처음, 한국어도 처음이라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음...한국에서 밥 먹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 ‘잘 먹겠습니다’. 내가 방금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거고.”
제럴딘은 난생 처음 들어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이 동그래지더니 한 음절씩 내뱉어보았다.
“좔. 멁 케... 씀미다”
아일랜드로 영어를 배우러 온 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한국어도 전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꺼내는 날이 오겠지. 아직 모든것이 낯설고 서툴지만 조금씩 이 나라와 언어, 새로 생긴 가족에 정을 붙여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