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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Sep 03. 2023

평행 또는 트라이앵글

카페에 청년 셋이 들어와 앉았다. 그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앉는 대신 주로 업무나 공부용으로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걸로 여기는, 긴 형태의 테이블에 차례로 앉았다. 가운데 사람을 중심을 두고 양옆 사람은 예각 삼각형의 구조로 느슨하게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보일 때가 있다. 가령 창가에 마련된 기다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지인들의 모습이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한창 이야기에 빠진 사람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분류해 보면 저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셋 이상 넘어가면 크게 개의치 않는데-나 말고 상황을 주도할 사람이 있다는 안심-둘이 되면 마주 앉아 나누게 되는 시선 처리부터 고되단 생각에 사로잡힌다. 대체로 내겐 사람이란 일종의 접대 관점 비슷하게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무슨 대화를 끊기지 않게 이어가야 상대가 덜 불편할까 하는 고민만으로도 피곤한데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는 건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란히 앉는다는 점은 앉은 거리만 적당히 유지되면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측면에서도 심적 안정을 주곤 했다. 시선 처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특히나 창을 두고 앉았을 때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소리나 할 소재가 넘친다.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할 경우도 사이에 음식을 두고 각자 덜어서 먹으면 되니까 편안하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시선 처리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 해방감이 들어 대화가 무리 없이 흘러가게 되곤 한다. 또한 내가 짓고 있을지 모를, 혹은 상대가 무심코 짓게 된 지루한 표정이나 불쾌도 스쳐 지나가 버리기 마련이라 그 찰나적 행위들에 의미 부여할 필요가 없어서 너그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상대의 표정을 잘 살피지 않아도 되지 않는 상황은 내겐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요즘 감정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감정에 대해 스스로 결정적인 확답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감정에 휘말리는 일은 피하고 싶다. 두뇌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 중 하나가 감정일 뿐이라는 안찬 생각을 한다. 머리를 차갑게 해서 흡입-소화-판단-도출해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가슴이, 마음이, 감정이라는 말보다는 ‘생각’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기 시작했다. 내가 앓고 있는 정병 중, 조울증의 경우 감당 못 할 만큼 감정의 극단을 오가는 상태를 지칭하는데, 그것을 두뇌의 작용이고 호르몬의 문제이고 따라서 적절한 복약과 신체 단련을 통해서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부터는 병증에 대한 두려움이나 슬픔이 많이 삭제됐다. 신체의 문제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를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 나의 경우엔 이것이 치유하는 데 가장 큰 자극제가 되곤 한다.


사람들과 마주 앉으면 무심한 내 성격 그대로 하면, 아마도, 빤히 쳐다보거나 아무 말도 안 하거나 갑자기 말을 하거나 그럴 것이다. 상대에게 관심이 없어서 내 관심사에 대해서 주로 말하고 말 터이다. 자주 그래왔기 때문에 잘 안다. 빤히 바라보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듣고부터는 시선 처리가 어려워졌다. 만나서 말없이 마주 보고 있는 게 내겐 별일 아닐지 몰라도 상대는 그 침묵을 힘들어하다 못해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그저 말없이 앉아 있으면서 골몰하거나 책을 읽거나 각자 생각을 하거나 그러다 할 말이 있으면 말을 걸고 상대가 말을 하면 두 눈을 고정한 채 상대를 바라보는 게 우리나라 사회에선 무례한 일이었다. 그 후론 친분이 깊지 않은 이와 약속이 있어 대화를 나눠야 할 때면 나란히 앉을 자리가 보이면 주로 그 자리에 앉지 않겠느냐는 요청을 한다. 승낙할 때, 못하는 배려와 집요한 관찰로부터 조금이나마 해방된다는 내적 기쁨 상상 그 이상이다.


다시 고개를 드니 청년들이 양 끝 두 사람은 완전히 몸을 상대들에게로 틀어 앉아 있다. 가운데 앉은 사람은 조금 의자를 뒤로 더 물려 안자, 서로가 자연스레 시선 교환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무리가 가지 않을 각도를 만들어 낸다. 저들이 보이는 표정과 가끔 유지되는 침묵과 가끔 엎드리거나 딴청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편안함이 꼭 나란히 앉는 자리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곧 세 사람이라는 위태로움은 사각형 테이블 네 개 자리에서 한 사람의 옆자리로 귀결된다는 걸 알아차린다. 누구도 작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자리를 만드는 나란히 앉아 삼각 형태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그들의 사소하고 섬세한 관심들이 삼각구도 속에 편안하다.


문화라든지 사회라든 관용이라든지 다양한 틀로 하나하나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 따스함과 자유로움을 생각한다. 나는 이후로도 나란히 앉겠느냐는 질문을 할 것이고 때로는 노력해도 더 이상 쥐어짤 수 없는 대화에 지쳐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다만 하루 종일 참새처럼 종알대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대체로 듣는 게 힘들지 않아 하는 나 같은 사람의 침묵도 이해받고 싶다. 눈을 내리까는 게 나름대로 배려의 방법이라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빤히 바라보는 건 적어도 지금 나누는 대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드러낸 표현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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