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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Sep 13. 2023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을 가르며 야수의 눈동자가 밝힌 빛

저마다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쾌하고 활달한 사람에게 끌리고 어떤 사람은 과묵하고 진중한 면모를 지닌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낀다. 재치 있게 웃기는 쾌활함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 경우는 무엇이든 유형화하는 걸 즐기기도 하도 그러면서 자신을 발견해서 분류 작업을 즐긴다. 결과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쨍하게 맑은 마음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치챘겠지만, 지극히 추상적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자기 능력에 해당하는 부분이라서 저런 이미지는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타인이 아니라 바라는 자아상 그 자체라 하는 게 맞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대체로 사람들은 함께 할 때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한 사람을 선호한다. 물론 자신을 긴장하게 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도 있을 수 있으니 대체로라는 부사어는 꼭 필요하다. 나는 이기적인 성품 탓에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와 관련 없이 나만 편안하면 별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 먼저 불편하고 불안하고 신경 쓰여서 사람 자체와 어울리는 걸 꺼린다. 독선적이고 제멋대로라는 평을 자주 듣다 보니 그렇지 않으려고 나름 진땀 빼고 그런데도 언피씨한 언사에 부드럽게 넘기지 못하고 맞서는 경우가 잦은 사람이 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피곤함은 당연하고 인간관계 자체에 지쳐버린 상태다. 열심히 관찰하고 머리 굴려 생각해서 대답-그렇다, 대체로 먼저 말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해도 통통 튀어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능력을 갖췄으니 이젠 나를 내가 포기해 버렸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예의를 놓지 않고 정중한 태도를 벗어던지겠다는 말은 아니다. 말을 삼가고 다만 상대에 대한 존중의 예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상대가 내게 갖는 호불호와 상관없이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방패이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동력이자 훈련이다. 그 어떤 무례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예의 바를 것, 무례로 되돌려 주는 과오를 범하여 자괴감에 빠져들지 말 것, 타인으로 인해 감정이 흔들리지 말고 고요할 것, 나를 뒤흔들 수 있는 모든 이유와 근거는 오직 나일 것. 여유를 가장하는 게 아니라 타인을 내 감정으로 끌어오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레 드러나는 태도로서의 관대함, 그 태도. 오래 묵상한 예(禮)의 지극한 경지는 내겐 이런 형태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무례하고 멋대로 행동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상대의 불쾌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하지 않는가. 무례엔 더 큰 무례로 응징하고 뒷말하면 인연을 끊을 준비부터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상화된 깨달음은 극기 훈련에는 도움이 되지만 지금의 분류작업에는 초점이 맞지 않는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여러 상황을 설정해서 그 안에 나를 집어넣고 보니 피부로 와닿는 상황이 있다. 그니까 이토록 까다롭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이, 늦잠 자고 일어나 하품하다 물 마시고 허벅지 긁으며 전화할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이지 않을까 싶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무말대잔치와 동문서답을 서로 주고받으며 때로는 각자 말하느라 서로의 말 따위는 듣지도 않고 종종 비속어를 섞어 쓰면서도 그러나 절대로 소수자 혐오 언어는 사용하지 않는 관계, 대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양가라고는 전혀 없어서 왜 전화했는지 어이가 없는 관계, 그러다 통화 중 발신 시 잠시 발신자 살펴보고 웬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사뿐히 무시하고 서로의 대화를 계속 이어가며 자기 말만 하거나 별 쓰잘머리 없이 너무 편해서 편한지도 모르고 말꼬리 잡아 농담하다가 쓰러져 뒹굴고 웃다가 앞구르기 옆구르기 돌려차기 휘몰아쳐 뒹굴러 착지하기를 끝낸 후 끊어 하고 정지버튼을 눌러버려도 편안한 관계. 예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상대에 대한 시기나 질투나 오해할 준비나 타인에 대한 비방이나 혐오 발언 같은 것은 전혀 없이, 가끔은 사회적 이슈에 심도 있는 고민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친밀하고 다정한 관계.


시간을 거스르며 추억을 떠올려 보면 서로의 곁을 오래 지키고 소중해했던 관계들이 저런 유형이었다. 긴장되고 설레고 휘어잡고 상냥하고 여유롭고 위트 있고 매력적인 모든 것이 더해진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베이스는 바로 저런 식의 편안함이 가능해야 이어져 나갈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친밀한 유머와 지극한 다정함이 가진 힘은 웃음으로 무장하고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을 가르며 야수의 눈동자가 밝힌 빛’ 기술을 사용해,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있는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부드럽게 강력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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