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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04. 2023

시간의 큐브

침실에 놓인 안락의자에 기대어 알싸하고 다정하게, 요즘 마음을 흔들어주는 람혼 최정우의 곡 <현현>을 들었다. 서늘한 감각에 무릎담요로 몸을 감싸고 기대어 있었다. 눈을 뜨고 물을 마시고는 이대로 몇 시간이 흘러갔는지 몰랐다. 시간은 저만치 흘러가는데 그걸 바라보면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물처럼 시간은 흘러가면 그뿐이었다. 매번 신선한 시간이 흘러들어오지만 내 진흙탕 같은 삶에선 이내 오염되어 흘러 나간다. 흘러간 시간이 고여든 곳은 아마도 늪처럼 질퍽하고 어두워서 가까이하기 꺼려질 공간일 터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여기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몸을 밀어 봐도 요지부동이다. 화장실에 가야 할 때 비로소 일어나 씻고 커피를 내렸다. 세수하니 조금 정신이 든 듯도 했다. 커피는 깨어남을 끌어당길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하지만 몸은 그대로 다시 돌처럼 굳어버렸다. 물을 잔뜩 마셨다. 시간이 멈추어서 큐브를 만든 것 같은 순간을 깨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몸의 신호였다. 그마저도 한참을 참다가 움직일 때 다시 물병에 물을 담고 커피를 한잔 더 내렸다. 이번엔 투명한 큐브에 갇혀서는 안 됐다. 음악을 껐다.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평생 감당 안 되는 바이크 소리, 가끔 숨구멍으로 물 뿜는 고래처럼 치익하며 멈추는 버스 소리 들이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목소리를 타고 미끄러져 왔다. 햇살은 갠 후의 싱그러움을 담고서 오후가 넘어가도록 강렬했다. 시간의 튜브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나를 가두고 있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어떻게든 이어가고 있는 외국어 학습 앱을 켰다. 벌써 60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걸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척 귀찮아하면서도 나는 저 숫자에 집착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상태가 얼마나 무너져 버렸어도 멈추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저 숫자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학습을 진행하면서 오늘 남은 일정을 계획한다. 일종의 가벼운 계획을 하지 않으면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어도 되고 중간에 변경되어도 된다. 하지만 큰 틀은 있어야 한다. 그게 또 나를 움직이게 했다.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운동을 하러 간다. 거기에 식사는 제외했다. 손발이 묶인 것처럼 식사가 거부되는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질 좋은 운동을 위해서는 식사가 기본인 걸 알면서도 마치 식사가 독이라도 되는 듯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질식될 것 같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사놓은 과자 몇 봉지를 챙긴다. 아마 과자를 못 먹을 가능성이 크다. 배가 고프다. 그러나 먹고 싶지 않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엔 의지력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좀 서글프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방이 이토록 무겁도록 채워놓았나 들여다보다가 반을 비워내고 거리로 나섰다. 생각 외로 바람이 많이 불었다. 추워서 입고 나온 긴 카디건이 제 기능을 잘해주고 있다. 횡단보도 불빛을 바라보며 자꾸만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카페 앱으로 주문을 미리 넣는다. 늘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 넣고선 엑스트라 사이즈를 할 걸 하고 후회하며 문을 밀어 들어간다. 아르바이트생은 이제 나를 알아본다. 카페 사장과는 간단한 대화도 한다. 멈추지 않고 나를 밀고 나온 또 다른 증거가 여기 있다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하루에 먹는 약이 스무 알이 넘는다. 그중 신경정신과 약이 대략 열몇 알이다. 그걸 삼켜내고도 나는 자주 쉽게, 살아야 할 생에 대해 회의하곤 한다. 그 생각에 골몰하지 않기 위해서 내게 기댈 마지막이 약이다. 아마도 이 약들을 먹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 보면 조금 무섭기도 하다. 카페에서 오늘 들을 음악을 골라서 이어폰을 끼고 들으며 봉지를 까서 커피와 약을 들이켠다.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공간을 상관하지 않고 자꾸만 만들어지는 저 단단한 시간의 큐브를 녹여냈으면 좋겠다고 기도 비슷한 것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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