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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eongseon Oct 08. 2023

환희에 찬 환멸

나가고 싶지 않다. 요즘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은 바로 저것이다. 일찍 일어나 사소하지만 거슬리던 집안일을 정리하고도 안락의자에 앉아 기대어 있었다. 나가지 않아도 될 궁리를 했다. 우선 음악을 틀어 놓고 감상했다. 지난밤 수면제 작용으로 반쯤은 몽중에 만들어 먹은 떡볶이, 가스레인지를 씻듯이 닦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양치하고 다시 세수하고 잠옷을 갈아입고 기대어서 버티다가 새벽 늦게 잠들었다.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정리했다. 마음에 드는 상황으로,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재배치해서 그나마 어울리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분주했다. 더는 손댈 곳이 없었다.


나는 망연해져서 기대어버렸다. 과도하게 움직여도 전혀 움직이지 않아도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가 조울증의 기저라는 것을 알기에 이 상태를 생각해 보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기대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나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강제할 수 있는 것, 생각해 보니 오늘 일요일은 플라스틱과 비닐을 버리는 날이었다. 뚜껑을 열었으나 먹지 않아 곰팡이가 핀 병들을 씻어내고 얼마 되지 않는 플라스틱과 비닐을 나누어 담은 봉지에 같이 엮었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기대었다. 오후 3시가 되어야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시스템이라 다시 할 일 없어진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영화를 한 편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기대어 있고만 싶었다. 창밖으로 차가 오가는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바라보고 있다 보면 내가 희미해져서 사라지길 바랐다. 마치 이 집의 가구나 컵이나 이불처럼 사물로 머물다가 먼지처럼 쓸어 담아 버려지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불과 며칠 전이 생각났다. 안락한 집을 두고 밤을 헤매는 마음. 어린 시절에는 가족이 걱정할까 봐 알아챌까 봐 마음 추스르려 헤맸다면 지금은 신경 쓸 누구도 없는 나만의 공간을 두고도 밤을 헤맸다. 무거운 짐 가득 메고 걷고 걸었다. 비가 막 그쳐 습하고 차가운 길을 걸으며 내 슬픔과 무기력과 고통을 내버려 뒀다.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고 나는 그저 너무나 외로웠다. 집 밖을 나가고 싶지 않은 지금과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의 간격이 서글프게도 좁아서 오히려 우스웠다.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머물지 못하고 그저 헤매는 것으로만 채워지는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후 3시가 훌쩍 지나고서야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가방을 메고 분리수거 봉지들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거리는 적당한 바람이 불고 적당한 사람들이 오가고 적당히 혼잡했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돌아서 적당한 카페에 들어섰다. 적당히 흩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노트북을 펼치고서는 음악부터 연결했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너무나 싫어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달랠, 그 정도의 적당함은 가늠되지 않아서 감았던 눈을 뜨고, 미룬 작업을 시작했다.


약을 먹고도 이렇게 어려운 게 스스로에 대한 고통인데 약을 먹지 않는 나는 얼마나 해로울까 생각하다가 웃었다. 지금도 그렇듯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자주 해롭다. 해로운 채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어떨 때는 환멸에 가득 찬다. 환멸은 자주 찾아온다. 마치 환상처럼 어딘가 소멸의 장소로 이끄는 다정한 손길처럼, 환멸은 환희에 찬 웃음을 활짝 피우며 두 팔 벌려 나를 안는다. 외로운 나는 거기에서나 안식을 얻는다. 환멸이, 환상이, 소멸이 어서 실현되길 나 역시 환희에 차 활짝 웃으며 간절하게 바라며 가득히 포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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