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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피오 May 17. 2018

2. 전전긍긍, 노심초사, 고군분투


오늘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 평범한 그대와 나는 ‘내맡긴다‘ 것의 개념도 모르지만 내맡길 ‘자연의 섭리‘가 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의 섭리는 너무도 많은데 어떤 자연의 섭리가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게다가 그것을 안다고 해서 나 자신을 통째로 내맡긴다고? 아니, 그런 위험한 짓을 어떻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는 삶의 태도가 사실은 인간들이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자연의 섭리다. 그리스도의 ‘사랑‘ 이나 붓다의 ‘자비‘ 등은 모두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법칙이다. 이슬람교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이런 종교의 말씀들을 섭리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극히 일부만 ‘사랑’과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을 뿐, 대다수는 내맡길 자연의 섭리를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섭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종교나 철학, 과학 등을 통해 배워서 알고, 또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의 섭리가 무엇인지 배워서 받아들여도 대부분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자연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내부에 실상을 왜곡시키고 있는 부정적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 욕망, 분노, 자부심 등과 같은 감정들은 거친 원시시대에 인류의 생존을 도왔던 것들이지만 필요 이상의 수준을 넘으면 인간이 주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 렌즈 역할을 한다. 가령 지나친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은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간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전전긍긍(戰戰兢兢)의 모습이다. 또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무엇이든 끊임 없이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매사에 몹시 마음을 쓰면서 애를 태우는 노심초사(勞心焦思)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지나친 ‘분노와 자부심’은 타인과의 경쟁을 부추겨서 삶을 각박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세상과 맞서 하루하루 격전을 치른다. 바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이다.   


오랜만에 만난 옛 직장동료들에게서도 전전긍긍과 노심초사 그리고 고군분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때 며칠씩 함께 밤을 세우며 프로젝트와 씨름하던 그들도 이제는 40대 후반이거나 50대 초반이 되었다. 만나서 반가운 인사 나누고 술잔이 몇 번 돌자, 이제는 마치 전설 같은 옛 추억을 더듬던 것도 잠시, 현재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아갔다. 그들 역시 지금 있는 회사에서 잘 나가던 못 나가던 관계없이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지, 또 그만 두면 뭐로 먹고 살아야 할지‘ 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더 높은 자리를 바라보면서 언젠가 저 자리에 올라가야겠다는 욕망으로 삶의 추진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리에서 밀려 나지 않기 위해, 또는 더 높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동료들과 알게 모르게 경쟁을 하게 된다. 일상 업무에서부터 연말 성과평가까지 자신의 경쟁상대와 비교하여 내가 어느 정도인지 항상 따져 보게 된다. 경쟁상대보다 못하면 분노로 에너지를 삼고, 경쟁상대보다 더 잘하면 자부심으로 에너지 삼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비록 나의 옛 동료들에 국한된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분노와 자부심 등이 오늘날 4-50대의 직장인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動因)이 아닐까?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면 사람들은 삶을 이끌어 줄 자연의 섭리 따위가 있다는 것을 믿을 여유가 없다.  자기가 알아서 앞으로 다가 올 삶을 계획도 하고 적절히 통제도 해야지, 만약 그러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결국 망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성공도 성공이지만 그보다는 비참하게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늘 더듬이를 힘껏 내뻗어서 미래에 다가올 일들을 걱정한다. 그리고 같은 목표를 가진 타인들과 죽고 살기로 경쟁하여, 뭔가를 소유하거나 통제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추상적이고 막연한 자연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마도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생존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프로그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심리적 프로그램 – 부정적 감정들로 삶의 원동력을 삼는- 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되게 되면 넓게는 인종과 국가마다, 좁게는 지역과 개인마다 독특한 특성이 생긴다. 지역에 따라 살아가는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문화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는 부정적 감정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같아도 서양인과 동양인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대륙에서 살아온 중국인, 반도에서 살아온 한국인, 섬에서 살아온 일본인의 사고방식 역시 차이가 난다. 한 꺼풀 더 들어가면 같은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개인마다 생각하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  


이것은 개개의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경험 물론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의미다. 개별자적 관점에서는 이는 곧 ‘자아’이다. 어릴 적에는 뚜렷하지 않던 자아가 커가면서 점점 명확해진다. 즉 점점 뚜렷하고 고정된 형체를 갖추어간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욕망, 분노와 자부심 등의 같은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가 나누어져서 결국에는 서로 다른 열매가 맺어지는 모습이다. 이렇게 개별자들에게 이르러 독특하게 맺어진 열매를 에고ego라고 부르는 데 이러한 에고가 발달하고 강해질 수록 인간은 고정되고 분명한 심리적 모습을 갖추게 된다. 즉, 딱딱하게 굳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에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에고는 조상에게서 물려 받은 심리적 유산이다. 조상들에게 그런 에고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살아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지 못할 것이다. 타고 나기를, 인간이나 짐승이나 할 것 없이 유기체는 외부에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적 원리로 인해 에고가 생겨난 것이다. 에고는 지금도 여전히 유기체인 우리의 생존을 위해 자기 이익, 획득, 정복, 다른 유기체와의 경쟁 등에 관여한다. 그러나 생존을 보장하는 이로움에도 불구하고 에고의 힘이 세지면 다스리기가 어려워진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에고는 세상 만물과 부딪치며 마찰을 일으키고 이는 곧 갈등으로 발전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에고 즉 ‘프로그램화된 부정적 감정의 세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 프로그램들을 제거하고 바라보는 우주의 본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이 거대한 우주는 도도히 흐르는 어떤 섭리에 의해 운영된다. 돌이켜 보면 지난 수 억년간 그 수많은 행성들은 자기 궤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돌아가고 있고, 봄과 여름과 가을, 겨울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태를 드러내고, 자그마한 씨앗은 누구의 보살핌도 없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고, 비는 주기적으로 내려서 필요할 때 마다 – 가끔은 애를 태운 적도 있긴 하지만 - 지구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이렇듯 인간이 의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우주는 제 갈 길을 아주 잘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연의 섭리- 여기서의 ‘자연‘이라는 것은 산과 들, 숲 같은 의미가 아니고 보다 본질적인 의미, 말 그대로 ‘스스로 원래부터 있는‘, ‘저절로 생겨난‘이라는 의미다 - 이라 부를 수도 있고 또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신의 말씀이나 신 그 자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하던, 사람이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그 흐름에 올라서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흘러간다. 뭔가를 소유하려고 남들과 경쟁할 필요 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 주어진다. 오히려 두려움과 욕망에 지배 받는 인간의 의식적 개입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파괴시킬 뿐이었음이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깨닫는다enlighten’는 것은 깊은 산 속에서 오랜 세월 벽을 바라보고 수련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고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깨달음의 본질은 생존이라는 것을 핑계로 진화의 원리가 우리에게 주입한 부정적 프로그램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부정적 프로그램들에서 벗어나면 정형화된 에고가 해체되고 유연한 진짜 자아, 즉 참나(眞我)에 접속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의 섭리에 나를 던지면 나는 물이 흐르듯 유유자적한 무위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흐르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주의 실상을 왜곡하여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부정적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생각을 할 때 마다 나는 위쇼스키 형제-지금은 남매를 거쳐 자매가 된-의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주인공 네오가 자신의 뒤통수에 꽂혀 있던 컴퓨터 접속 플러그를 스스로 뽑아 자신을 조종하던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던 그 장면이 생생하게 줌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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