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아나 Jan 27. 2023

우울증 그 끝엔, 퇴사

11년간의 직장생활을 접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우울증이었는데 자꾸 다른 주제들로 넓혀가서 결국 우울증에 대한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 지어야 나의 30대의 우울증도 마무리 지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30대로 한정한 것은 우울증이 인생에 한 번만 올 것이라는 긍정적인 태도는 갖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사주는 '흙(土)'를 깔고 있는 '불(火)'이라고, 명리학 공부를 하는 친구가 만세력을 봐주면서 얘기해 주었다. '불'은 열정적이고 번지는 특성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있는 '흙'를 깔고 있어서 그 열정이 자꾸 머뭇거린다고. 내 안에서 머리로 생각하는 것들은 참 많은데 실천하지 못하고 자꾸 머뭇거리는 것이 자꾸 우울증이라는 키워드가 나를 붙잡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한 챕터를 넘기기 위해서 얼른 우울증의 마지막까지를 글로 뱉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울감이라는 것은 나에게 늘 옆에 있는 친구 같은 것이었다. 띄엄띄엄 써오는 일기장의 어떤 페이지를 들쳐봐도 우울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서 지내며 오랫동안 서랍 구석에 처박혀있던 일기장들을 들여다보았는데 들여다보는 페이지마다 우울감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10년, 15년 전에도 나는 항상 우울감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구나, 다시 한번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타고나길 멜랑콜리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확인사살도 참 여러 번 당한다.


10여 년의 회사생활 끝에 30대 중반에 퇴사한 사람들의 에세이들이 출간되는 걸 보면서 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쭉 회사생활하다 보면 아빠처럼 30여 년이 넘는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직장 생활 중 몇 번의 번아웃을 넘기고 심각하게 찾아왔던 4년 전의 번아웃은 심리상담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 후 몇 달간 심리 상담으로 매주 인공호흡해 가며 삶을 유지해 갔었다. 그러다 홍콩으로 이주하게 되고, 새로운 환경의 삶의 터전과 직장, 압박스러운 업무량과 상사 등이 합쳐지며 정신과에서 우울증으로 진단받고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심리 상담을 받은 지 딱 1년째 되는 때였다. 나의 상담 선생님도 한참 나아지다가 몇 달 만에 약을 먹자는 제안을 하시며 속상한 마음을 내비치셨다. 


우울증 약을 먹고 또 1년, 한 동안 약빨로 감정기복이 많지 않았다. 홍콩이라는 공간에도 적응해서 약을 먹는 것 외엔 꽤나 즐거운 생활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이번에도 환경이 돕지 않았다. 나의 상사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와중에 본인을 증명해 내야 한다는 불안을 남들보다 훨씬 많은 업무량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전 회사에는 있었으나 현재 회사에는 없는 한 가지에 꽂혀 남들이 진행하는 것보다 반절의 시간, 반의 반절의 인력인 나 혼자를 가지고 생전 해보지 않은 IT 시스템 개발업무를 시키기 시작했다. 본인도 이 전 회사에서 여러 명과 함께 1년 동안 개발했던 시스템을 6개월 만에 완성하자고 했다. 물론 기존에 하던 업무들은 그대로였고, 매 연초마다 진행하는 각 나라의 10년 치 전략검토가 겹쳐진 시기였다. 개발의 D자도 모르던 나는 매일 알아듣기 힘든 IT용어와 그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웠던 인도의 영어발음을 가진 개발자들과 함께 3-4시간씩 전화회의를 해야 했다. 중간에 계속해서 바뀌어대는 상사의 디테일한 지시에 나와 인도의 IT agency의 contact point였던 Nitasha는 매일 미안함과 지침의 헛웃음으로 서로 'Good afternoon'이라는 거짓 인사로 전화회의를 시작하곤 했다. 인도는 코로나 상황도 심각했어서 인도 쪽 에이전시에서도 코로나로 빈자리가 자꾸 생겨만 갔고, Nitasha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아기우는 소리는 나의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불러일으켜 늘어만 가는 요청사항에 미안한 마음만 커져갔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쿼리들을 열고 닫았다.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인채 여기저기 자랑할 만한 프로젝트는 하나 완성되었고 나는 미국 본사의 동료들과 아시아 각 국가들의 동료들에게 이 시스템의 성공적인 론치를 알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상사에게 전달했다.


예전처럼 꾹꾹 참기만 하다 터뜨린 것은 아니었다. 10여 개 국가의 10년 치 전략을 취합하고 검토하는 것, 각 나라의 모든 제품의 매 년 가격 승인을 진행하는 것, 그리고 추가된 IT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 그리고 늘 중간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요청들, 지금 돌아봐도 절대 업무량 자체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퇴사를 결정했던 것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상사였다.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은 계속 많아지기만 했고, 그나마 가장 믿는 나에게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아오기를 원했다. 이 정도 확인했으면 이제부터는 상대방을 믿고 넘어가줘야 한다는 그 선의 높이가 나와 너무 달랐다. 


그리고 나의 업무능력에도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우울증은 나의 기억력을 인지할 정도로 크게 떨어뜨렸다. 처음에는 이게 나이가 들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우울증 때문인지, 우울증 약 때문인지, 업무량이 많아서 그런 건지 그 원인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예전과 다르게 발생하는 실수들 때문에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지적을 받기 싫어서 분명 여러 번 확인을 했는데도 또 실수가 생겼다. 결국 나는 우울증 때문에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상담선생님과 정신과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고, 우울증은 기억력까지 떨어뜨린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떨어지는 업무능력을 가지고 계속 지적만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이해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과도한 업무량과 업무 파트너들에 대한 신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의 우울증을 오픈했다. 안타깝게도 나의 우울증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상사에게 그 심각성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우울증이 기억력을 떨어뜨린 다는 것에 대해 상사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조금 더 노력을 기울이기를 요청했다. 그것에 더해, 나의 우울증을 공감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는지 그녀가 자신이 경험한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자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상사는 그녀가 결혼 적령기에 선을 몇 십 번 보면서 선을 보고 나서 지속적으로 맘에 들지 않은 상대가 나타났을 때 본인도 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우울증을 고백하고 돌아온 반응 중에 가장 단단한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홍콩의 정신과 선생님의 진단서 덕분에 2주간의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다가 다시 출근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업무량을 줄여주겠다는 시점은 늘 프로젝트 이후로 밀려있었고, 프로젝트의 1차 런치가 끝난 후에 나는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 2차와 3차가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득했다. 그리고 끝까지 공감되지 않을 힘듦을 계속해서 주장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회사의 구조조정이 있어서 다른 부서의 빈자리들에 지원을 해볼까도 했지만, 마른걸레를 쥐어짜봤자 더 이상 에너지는 나오지 않았다. 


2주간의 휴가 후, 몇 주 뒤 나는 결국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홍콩은 한국과 달리 사직 3개월 전에 회사에 알려야 한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후로 3개월의 시간을 함께 일 해야 하는 것도 참 난감한 일이었다. 코로나 와중에 나는 홍콩에서, 상사는 서울에서 직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서로에 대한 마음에 상처를 애써 감춘 채 웃으며 일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잃은 캐나다, 중국, 미국에서 온 친구들과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했다. 각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친구들과 씁쓸하게 언젠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거의 불가능한 끝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안아주었다. 후덥지근한 홍콩의 날씨 때문에 모두의 옷이 습기인지 땀인지 모를 것에 살짝 젖어 있었다. 


11년간 쉼 없이 일했던 직장을 잃은 것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토록 좋아했던 홍콩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맘에 드는 삶의 터전을 찾았는데 이 망할 놈의 정신병 때문에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2년간 사귄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이유를 모두 소상히 알릴 수는 없었다. 그저 일이 힘들었던 것으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 드러낼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홍콩에서의 흔적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노트북 반납 후 사무실을 나서며


매거진의 이전글 예민해서 힘든 너를 위한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