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사람, 엠패스(Empath)
뉴턴의 제2 법칙은 관계에도 적용된다.
폭발적으로 친해진 관계는 대체로 끝이 좋지 않았다. 알게 되자마자 며칠 내내 단체 카톡방에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잠까지 줄여가며 카톡을 했던 많은 관계들은 관계의 가속도만큼 커다란 힘으로 깨어졌다. 반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조금씩 가까워진 관계들이 더욱 요즘의 나를 더 채우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몇 달 동안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독서모임이 3년째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여러 모임규제 사이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유연하게 진행되어 벌써 3년이 되어가고 있다. 책을 읽고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보다 나의 많은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문학을 읽다 보면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에 현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겪은 사건들, 그가 했던 생각, 말들을 나에게서도 찾아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3년간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멤버들은 나의 취향과 MBTI 뿐만 아니라, 성장 배경, 사고의 흐름, 인생의 굴곡, 성향까지 알게 되었다. 아마 그들은 내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도 놀랍지 않게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독서모임의 한 축인 언니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언니가 사는 중미의 한 나라에 놀러 가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나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 친밀한 느낌을 받은 언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른 언니가 용산의 한 카페에서 언제나처럼 처음 듣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너는 엠패스(Empath)일 거야.
민감한 엠패스들은 혼자서 에너지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 때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그게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맞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무언가로 규정하여 발화하는 말을 들으면 불쾌한 경우가 많은데, 그 단어는 내가 판단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단어는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엠패스가 무엇인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로 나온 검색결과는 많지 않았다. 그중에 한 블로그에서 엠패스인 자신과 나르시시스트인 엄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블로거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 관계가 바로 나와 엄마의 관계임을 깨달았다. 나와 동생은 자기 위주로 사고하고, 자녀를 트로피와 같이 생각하는 엄마로 인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을 오래 살아왔다. 그중에 감정적으로 더욱 예민한 나는 엄마의 불안과 분노의 감정을 쉽게 흡수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이 나르시시스트인 상사를 만나 그 불안과 분노를 배출하는 창구가 되어주다가 소진되어 버렸다..
엠패스는 empath라는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아주 예민한 동시에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초민감자로 번역되는 HSP(Highly Sensitive People)와도 다른 개념이다. HSP는 자극에 대한 역치가 매우 낮아서 시끄러운 소리, 냄새, 밝은 빛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금쪽상담소에서 오은영선생님은 자우림의 김윤아를 초민감자로 분류하였다. 엠패스는 초민감자의 특성에 더하여 사람이나 환경에서 오는 에너지를 쉽게 흡수한다.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에 더불어 그 사람의 감정이 나에게도 느껴진다. 상대방이 소리를 지르면서 분노를 할 경우 그것이 그대로 느껴지며, 슬퍼할 경우 그 슬픔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그래서 엠패스들은 과도하게 감정을 끌어내거나 잔인하거나 폭력성이 짙은 영화들을 보기 힘들어한다. 또한 어떤 엠패스들은 동물이나 식물, 환경과도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많은 부분에서 나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인이 엠패스임과 동시에 엠패스에 대해 연구하고, 그들이 좀 더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주디스 올로프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강연과 책, 본인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그룹의 엠패스 커뮤니티 등을 통해 엠패스에 대해 알리고 돕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그녀의 강연들을 듣고, 바로 그녀의 책 '나는 초민감자입니다'를 샀다. 나의 예민함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 예민함에 대해 쓴 글에서와 같이 이 예민함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답이 선물처럼 나에게 전달되어 온 느낌이 들었다.
아래는 '나는 초민감자입니다' 책에 나온 엠패스 테스트이다. 예민함이 힘든 분들은 한 번 테스트해 보았으면 좋겠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초민감자'라는 단어는 엠패스를 번역한 단어로 사용했다. 개인적으로 HSP를 초민감자로 번역하고 엠패스의 경우엔 다른 용어로 번역하거나, 엠패스 그대로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원래 제목도 'The Empath's survival guide'이다.
엠패스 자가진단 (출처: 주디스 올로프 '나는 초민감자입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로 답하세요.
지나치게 민감하고 수줍음이 많다거나, 내성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주 압박감을 느끼고 불안해지는가?
말싸움이나 고함을 들으면 불편한가?
무리에 섞이지 못한다는 기분이 자주 드는가?
군중 속에 있으면 녹초가 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기운을 차려야 하는가?
소음이나 불쾌한 냄새,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을 견디기 힘든가?
화학물질에 민감하거나 따끔거리는 옷을 잘 못 입는가?
어디를 가든 일찍 나오고 싶을 경우를 대비해 본인의 차를 가져가는 편인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식을 하는가?
친밀한 관계로 인해 숨이 막히게 될까 두려운가?
깜짝깜짝 잘 놀라는가?
카페인이나 약물에 과민하게 반응하는가?
작은 고통도 참기 힘든가?
사회적 고립을 택하는 편인가?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나 감정, 신체 증상을 흡수하는가?
멀티태스킹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편한가?
자연 속에서 재충전을 즐기는가?
어려운 살마이나 에너지 뱀파이어를 상대한 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대도시보다 소도시나 시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가?
여럿이 모이는 것보다 일대일이나 적은 인원과 교류하는 게 좋은가?
결과계산
'그렇다'고 답한 문항이 1~5개라면, 당신은 최소한 부분적인 초민감자입니다.
'그렇다'고 답한 문항이 6~10개 라면, 당신의 초민감자 성향은 중간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답한 문항이 11~15개라면, 당신은 초민감자의 성향이 강합니다.
'그렇다'고 답한 문항이 15개 이상이라면, 당신은 완전한 초민감자입니다.
나는 17개의 문항에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 그렇지 않을 수 있는지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엠패스인 내가 어떻게 삶을 다스려나가고 있는지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아직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지만, 어느 나라보다 촘촘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엠패스들은 그 어느 세상의 엠패스 못지않게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자극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마련해 나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