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린이 Feb 21. 2021

운명 앞에 서서

드니 빌뇌브, <컨텍트> 후기

             

 “지금 살고 있고 과거에 살았던 이 삶을 당신은 다시 한 번 그리고 셀 수 없이 여러 번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 삶이 다시 한 번 그리고 수없이 계속 반복되길 원하는가?”     

 <즐거운 학문>에서 제시했던 니체의 영원회귀 사유 실험이다. 당신은 이런 반복되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보통 하나의 길로 표현된다. 과거의 길과 미래의 길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현재의 나. 그 길 위에는 달콤한 행복이 있기도 하지만 쓰디 쓴 고통도 있다. 죽음, 고독, 상실, 슬픔, 분노 등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소가 많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현재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더 나아가서 미래를 예측해서 앞으로 일어날 고통을 최소화 하고 싶어한다. 이는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미래 예측이나 운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보편 관심사였다. 옛날 신화 속에 등장하던 신탁부터 동양의 점성술, 오늘날 다양한 매체의 소재로 등장하는 예언 능력자나 미래를 여행하는 스토리 등은 인류의 운명과 미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운명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운명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단순한 사건의 발생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사고방식이 맞고 틀린 지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운명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운명을 가정했을 때,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믿는 사람들에게 운명이란 무엇일까? 언제 운명을 느낄 수 있을까? 바로 우연적 사건이 반복될 때 느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 우연들이 반복될 때, 우리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운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부모 관계를 들 수 있다. 인간이 제어할 수도,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표현도 두 사람이 어떻게 지금, 여기서 서로를 사랑하는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인 것이다. 한편,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맞닥뜨렸을 때도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느낀다. 갑작스런 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감을 느끼곤 한다. 이때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이를 보았을 때 운명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러한 미지의 영역인 운명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신화처럼 운명을 알고서도 비극적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혹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다가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믿지 않고 자신이 살던 대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떤 행동해야 할까? 


 영화 <컨택트>는 이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제시한다. <컨택트>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그의 전작 <그을린 사랑>에서부터 인간이 운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제기해왔다. 그는 처참한 운명의 모습을 맞닥뜨렸을 때의 인간을 아주 섬세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을린 사랑>에서 보여줬던 인물의 태도는 인간이 끔찍한 운명에 처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운명에 대한 태도는 <컨택트>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는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애덤스 분)가 딸 한나(Hannah)와 같이 노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장면은 곧바로 딸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슬퍼하는 루이스 박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그녀는 갑자기 지구에 찾아온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해독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그녀는 이안 도널리(제러미 레너 분)라는 과학자와 함께 원형의 외계 언어를 해독하는 작업을 한다. 점점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결국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게 된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인간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고, 300년 뒤 위기에 처한 자신들을 위해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외계인들은 시간을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언어를 습득하게 된 루이스 박사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게 된다.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그녀는 미래에 낳은 딸이 희귀병에 걸려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영화의 첫 장면은 과거가 아닌 미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낳겠다고 결심하는 루이스 박사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컨텍트>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조금 어렵게 느낄 수도, 혹은 실망할 수도 있다. 외계인 영화라고 했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장면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외계인의 침공과  그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모습과 같이 일반적인 외계인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들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외계인과 소통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영화이다.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할 것인지,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언어학적 내용이 영화 전반에 깔려 있어서 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상당히 흥미롭게 표현되고, 언어학자가 외계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외계인이 지구에 왔을 때,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닌 우리를 도우러 왔다는 설정 자체도 지금껏 다른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다. 특히 마지막에 운명을 받아들이는 루이스 박사의 태도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은 이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외계인이 인간에게 주려고 한 선물은 시간을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주인공인 루이스 박사는 시간을 원형으로 인식하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도 현재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외계인의 언어에도 반영이 되어 있다. 앞과 뒤가 없이 원모양의 표의 문자에 모든 문장 요소를 포함시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인식체계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을 하나의 선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선형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시간을 원형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설정을 했고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컨택트>를 단순히 재미난 SF영화로만 본다면 놓치는 내용이 많다. <컨택트>는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루이스 박사는 외계인이 준 능력을 통해 미래에 자신의 딸이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낳기로 한다. 이는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속성과는 대비되는 선택이다. 우리가 원형적 시간 인식을 하게 되어 미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루이스 박사와 같은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아예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거나 어떻게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박사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거나 순응하기보다는 운명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딸과 함께했던 시간들, 그것을 통해 느낀 행복을 소중히 여겼다. 설령 딸이 이른 죽음으로 끝나는 슬픈 운명이지만 그것마저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운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그것은 바로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의 내용이다.           


 “인간에게서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다. 필연성을 견뎌내는 것도 아니고 은폐하는 것도 아니라, […] 오히려 그것을 사랑한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지> 10          


 니체의 운명애라는 개념을 보다보면 그가 우리 보고 순응적으로 살라는 뜻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 운명 앞에 어떤 것이 있어도 참고 견뎌내라는 식의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는 운명애를 말하면서 운명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를 우리에게 바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갖길 원했다. 순응은 소극적이고, 사랑은 적극적이다. 순응은 참고 견디는 과정이고 사랑은 승화하는 과정이다. 운명이 비록 비극일지라도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태도는 니체가 말한 운명을 대하는 법이며, 인간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뜻밖의 죽음, 질병, 사고 등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잔인하고 혹독한 요구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 때문에 가혹한 운명을 쉽게 사랑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마 니체 또한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운명이 슬프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명을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리고 덮어놓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 남아 있기에 그것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운명에 좌절하는 일을 겪을 때 낙담하고 나약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기뻐하며 운명을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과정, 그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컨텍트>의 루이스 박사는 과연 이러한 니체의 태도를 잘 갖춘 사람이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그녀의 딸이 병에 걸려 일찍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아이를 갖기로 했으니 말이다. 인간이 비극적인 미래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모성애라기보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운명에게 담담하게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거대한 운명을 인간이 견뎌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운명 앞에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운명,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어떤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어느 말보다도 멋지고 용기 있는 고백이다.


 이러한 운명애적 태도는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하였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푸쉬킨이 노래했던 ‘삶이 우리를 속이는’ 상황은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고, 동시에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운명애는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긍정의 힘은 운명 앞에서 턱없이 나약한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운명애를 통해서 삶을 긍정하고 그것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다시 처음의 니체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보자.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끝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 생애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설령 그것이 비록 무한히 반복되는 삶이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운명애를 통해서 말이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동시에 용기 있고 대담한 고백일 것이다. 이러한 고백적인 태도는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니체의 사고실험은 우리에게 절망감이 아닌 희망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결국 니체와 <컨택트>는 본질적 메시지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문학 글쓰기 수업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