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교 교수님들의 시국 선언을 접했다. 그 명단 속에서 낯익은 성함들을 찾으며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렇게 빠르게 행동하는 분들이셨나?
교육 현장에서만 봬온 분들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사회 참여적인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든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게 반갑기도 하고 목소리를 내주셔서 감사하기도 했다.
나는 정치색이 없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 그런데 반갑고 고마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을 발 빠르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견제와 균형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해주고 있었다. (나로선 여건이 안 돼서, 혹은 능력이 부족해서그들이 시국 선언으로 얻을 '득'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박경리 작가님의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 말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오자 일부 양반 계층은 하위 계급을 이끌고 의병 활동에 참여한다.(물론 다양한 신분의 의병장이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한적으로 양반의 의병 참여에 주목하도록 하겠다.)
몽매한 백성들이야 우리가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어찌 알겠소. - 박경리, <토지 4>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훈장은 두 발 벗고 의병대에 동참한다. 외골수 훈장님의 재발견이랄까? 지식인들이 평범한 농민들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러 가야 한다는 그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엿봤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책임
양반이라는 계급적 특수성을 과시한 문장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최소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항일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대응 방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과연 나라면 내가 가진 전부를 버리고 나랏일에 나설 수 있었을까? 목숨마저 내놓고 말이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북한군이 러시아 군대에 파병된 일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
다. 우리의 관심은 '과연 3차 대전이 일어날지'였다. 아무래도 6.25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어본 세대라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친구가 지인 A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A는 나름 전문직 종사자인데 아이들 영어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고. 그 이유는 이랬다. 혹시라도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미국으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나름 사회적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을 그에게 주어진 옵션이 이민과 도망이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였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고,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보장되는 개인의 선택이기에 제삼자가 비판할 여지는 결코 없다. 그렇지만 이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랄까? 거기에 더불어 씁쓸함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