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 마이아더백
타라 마틴은 로스 엔젤레스에서 장을 보고 나오며 프라다 가방 대신 식료품을 담을 수 있는 환경 친화적인 가방이 없을까 고민하다 마이아더백을 설립하게 된다. 마이아더백은 캔버스 가방의 한 면에 명품 가방을 패러디한 그림을 그려넣고 다른 면에는 My Other Bag이라는 자사의 이름을 크게 써넣은 캔버스 가방을 만든다. 백 달러가 채 안 되는 캔버스 백을 들며 나의 다른 가방은 명품이라고 말하는 위트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천 가방은 패션 블로거와 셀러브리티를 통해 노출되며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셀린의 러기지백, 발렌시아가의 모터백, 마크 제이콥스의 스탐백, 샤넬의 2.55백 등이 캐리커쳐로 캔버스에 프린트되었고 루이비통의 여러 가방 역시 패러디에 사용되었다. 안타깝게도 루이비통은 마이아더백의 농담에 웃지 않았고, 마이아더백은 2014년 루이비통에게 소장을 받게 된다. 루이비통은 마이아더백이 루이비통의 패셔너블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편승하여 마케팅을 하고 소비자들이 마이아더백의 디자인이 루이비통이 허락한 것이라 믿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이아더백의 루이비통 프린트 가방이 루이비통 가방의 희소가치를 떨어트린다고 했다.
문제가 된 상표는 세 가지 꽃 디자인과 겹쳐진 L, V로 이루어진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디자인, 같은 무늬에 색 변주를 준 모노그램 멀티컬러, 체크 문양의 다미에 문양이다. 마이아더백이 이 상표가 들어간 루이비통의 제품을 그려넣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타인의 상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라이센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는 법. 상표의 사용이 패러디를 위한 것이라면 상표 권리자에게 라이센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이다. 따라서 마이아더백의 그림을 패러디로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루이비통은 소비자들이 제품의 유사성을 혼동할 우려가 있다며 상표 침해를 주장했다. 하지만 고가의 루이비통 가방에 비해 마이아더백의 제품은 가장 큰 사이즈도 백 달러를 넘지 않는 저가 제품으로 타겟 소비자층이 완전히 다른 가방이다. 또한 마이아더백은 자사 제품의 루이비통 모노그램 캐리커쳐에 LV 대신 MOB (My Other Bag)를 새겨 자신의 가방이 루이비통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루이비통은 소비자가 혼란을 느낀다는 점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상표 희석에 대해서도 루이비통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패러디란 독창적이면서도 독창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고 설명하며 마이아더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마이아더백은 루이비통의 디자인임을 알아챌 수 있는 그림을 그렸지만 캔버스 천이라는 루이비통의 고급 이미지와 상반되는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과, “나의 다른 가방"이란 이름을 가방 뒤편에 써놓아 마이아더백의 가방이 루이비통 가방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루이비통의 상표와 명성만을 이용하여 제품을 판매하려고 했다면 이는 분명 상표법 위반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마이아더백은 소비자들은 마이아더백의 가방을 루이비통으로 오해해서 산 것이 아니라 루이비통의 명품 이미지를 패러디한 위트에 지갑을 열었음을 보여주었다. 마이아더백이 루이비통 이외에도 수많은 명품 브랜드 가방을 패러디 했다는 점도 마이아더백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저작권 침해에 관해서도 법원은 마이아더백의 패러디가 새로운 표현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아 침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루이비통이 판결에 불복한다는 뜻을 밝혔기에 이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심과 이심에서 연거푸 패소하며 루이비통은 작은 브랜드를 괴롭히는 불량배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된 반면 마이아더백은 소송 과정에서 루이비통과 함께 지속적으로 언급되며 자동적으로 광고 효과를 누렸다. 비슷한 효과는 “츄이비통 (Chewy Vuitton)"이라는 애완견 장난감 회사와의 소송에서도 나타났다. 이들 케이스는 루이비통의 명성이 오히려 독이 된 경우다. 브랜드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마이아더백이나 츄이비통의 패러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한 사용인지 상표권 침해인지의 여부는 각 사안마다의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마이아더백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이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