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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reset

 집 밖으로 안 나가는 날이 있고, 못 나가는 날이 있다. 어제는 집 밖으로 못 나가는 날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눈물은 쏟을 수도 삼킬 수도 없어서 자꾸만 코가 시큰거렸다. 몸이 여기저기 아픈 것은 심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갈 기운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힘을 낼 수 없어서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더블 싱글 침대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작은 세상에 갇혀 하루를 보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고통의 무게, 상처의 크기, 분노의 열감 그 어떤 것도 줄어들거나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전까지 친구였던, 이제는 알 수 없는 상대를 상상 속에 세워두고 날마다 혼자 싸웠다. 내가 알던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와 싸우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뜨겁게 솟구치는 분노,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기혐오와 무기력함을 견디며 간신히 일상을 유지했다. 최소한 당분간은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그는 평소에 하지 않던 장난을 걸며 자꾸만 나를 건드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네가 한 말에 기분이 나쁘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기분이 더럽다고 말했다.


 난 기억도 안 난다, 기분이 나빴으면 그 당시에 바로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말하는 거냐, 농담하는 분위기에서 한 말로 혼자 예민하게 군다, 상황과 맥락을 봐야지, 난 우리가 친한 사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얘기나 다 해도 되는 건 줄 알았다, 니가 이렇게 선을 그으니 오히려 내가 기분이 나쁘다, 그렇게 피해자 의식 갖고 살지 마라, 너한테 하는 마지막 충고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K는, 더는 오래된 친구가 아니었다. 언제든 내게 “벗은 사진 보내봐.”라고 말하고 모든 걸 내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타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삼켜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남은 건 오로지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필라테스 학원으로 산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쳤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나는 쉴 틈 없이 여기저기로 도망쳐야 하는 걸까. 십수 년을 친구라고 믿었던 K는 어디로 간 걸까.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연차를 쓰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금요일 오전이었다. 피로를 이기지 못해서 쉬려고 쓴 휴가였지만 미뤄놓은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나가려고 하는데 나갈 수가 없었다. 목줄이라도 매어놓은 것처럼, 도저히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었다. “못하겠어.”


 마음이 세상의 끝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내게서 걸어 나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우울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아주 높은 곳에서 아주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낙차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동시에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낙하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그대로 몸이 얼어버렸다. 흘리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눈물은 쌓이기만 했다. 차라리 울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울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때로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은 마음이 찾아왔다. 처음엔 너무 오랜만이라서 당황한 나머지 그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내버려 둘 뻔했다. 가끔은 나를 장악하고 마음껏 휘젓도록 몰래 문을 열어주고 싶기도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나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갑자기 마음이 찾아와서 문을 여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억울함과 분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그런 놈 때문에 애써 일군 일상이 무너져선 안 되잖아. 그건 너무 분해. 안 그래?


 오전 5시 55분, 알람을 끄며 눈을 뜬다. 6:00, 6:03, 6:05, 6:07. 깜박깜박 졸았다 깼다를 반복하며 네 개의 알람을 끄고 나면 누운 채로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누워서, 앉아서, 일어나서 짧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유산균 한 포와 비타민 한 알을 삼킨다.


 일단 하루를 시작하고 나면 어떻게든 하루가 굴러간다. 내 몫의 삶을 착실하게 살아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 마음이 매일 아침 영양제를 삼키며 고통과 무기력의 리셋 버튼을 누르게 한다. 어제의 괴로움은 어제의 것으로 마감하고, 새롭게 오늘을 시작하게 한다.


 출근할 수 있으면 퇴근할 수 있다. 어제 했으면 오늘도 할 수 있다. 퇴근 후 시장에 가서 신선한 채소를 사고, 다음 날 점심으로 먹을 샐러드를 만든다. 매일 밤 잠들기 전 글을 읽고, 매주 한 편의 글을 쓴다. 주 3회 필라테스를 하고, 아프지 않은 주말에는 산에 가고, 나에게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낙하하는 마음이, 벌어진 상흔이 자꾸만 기억을 일깨우고 과거로 데려가지만, 온 힘을 다해 돌아선다. 과거의 기억에서 도망쳐서 오늘의 삶으로 돌아오려고 애를 쓴다.


 세상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 또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어쨌거나 결국엔 오늘로 돌아와야 한다. 스트레칭과 영양제면 된다. 그렇게 시작할 수만 있으면 된다.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른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달라질 가능성이 있으니까. 당장은 내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내일에 대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빈 칸을 남겨두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 집 밖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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