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시작했으니 이제 세 번만 더 시작할 수 있으면 이번 주도 끝이다. 아- 정말 출근하기 싫다.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남은 평일을 세어본다.
오늘처럼 녹초가 되어 퇴근한 날에는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마음과 뭘 먹어야 할지 모르는 마음 사이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느라 더 녹초가 되곤 한다. 오늘은 가본 적 없는 동네 분식집에서 쫄면을 포장했다. 평소의 나라면 배달 앱을 열어 후기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야 메뉴를 고르고 배달 주문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지난 연인은 이 분식집 앞을 지나며 말했다.
“앞으로 너 기다릴 때 여기서 야식 먹으면 되겠다.”
아직 그를 만나고 있었다면 아마 그는 일주일에 몇 번씩 이곳을 들렀을 것이다. 아니지. 매일 내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으로 날 데리러 오던 그가 우리 동네에서 날 기다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을 것이다. 나와의 미래를 상상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던 그를 떠올린다.
쫄면 포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손님들이 들어온다. 주로 혼자 온 손님들이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이 된다. 피곤한 날에는 실패를 웃어넘길 여유가 없다. “고작 밥 한 끼”의 문제가 아니다.
집에 들어와 검은 봉지를 열자 흰색 플라스틱 뚜껑이 덮인 종이 용기가 나온다. 뚜껑을 열자 비닐백 안에 쫄면이 들어있다. 묶인 비닐백을 풀어보니 고소한 참기름 향이 흘러나온다. 오오. 별 기대 없는 도전이었는데.
앞니로 쫄면 면발을 끊으며 생각한다.
아 그러니까. 지난 연인에 대해 말하려던 게 아닌데...
오늘 나는 종일 연인을 생각했다.
회사에 있는 내내 긴장 속에 부대끼면서도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던 건 지난밤 연인의 말이었다.
“(나랑) 같이 잘래, 혼자 잘래? 선택은 니가 해”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귀가한 연인은 전화를 걸어 혀 꼬인 발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또렷한 발음으로 청춘 드라마 속 대사 같은 말을 던졌다. 밤 11시. 가방을 챙겨 택시를 타고 연인의 집으로 갔다. 비밀통로를 통과하듯 바로 그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가족과 마주치지 않은 채로 잔뜩 취한 그를 안았다.
우리 이럴 거면 같이 살자. 비틀거리며 그가 말했다.
그럴까? 같이 살까? 어디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시작하자. 그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내게 기대며 말했다.
불이 꺼지고 연인이 내민 팔을 베고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꿈을 꾸었다. 갑자기 확 넓어진 연인의 집 한가운데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나. 잠들기 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래 여기서 산다 쳐. 내 짐은 어디다 둬?’ 라고 생각했고 나의 무의식은 연인의 집을 운동장만 하게 넓혀주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깐 내 짐 놓을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아니 근데, 집만 넓어진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한밤에 택시를 타고 연인에게 간 것은 지난주의 어느 아침 때문이었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연인이 옆에 있었다. 지난밤 한 침대에서 잤으니 여전히 그가 옆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날 아침엔 뜬금없이 놀라웠다. 놀라면서 행복하다고 느끼고, 또다시 놀랐다.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이 좋다고 느끼다니. 불과 몇 달 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또 놀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행복감은 또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택시를 타고 연인에게 갔다. 같이 자기 위해서.
새벽에 잠에서 깼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그의 품에 안기자 온몸이 따끈따끈 말랑해졌다. 행복할 때마다 나는, 그도 지금 행복할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이 너 결혼할 생각 없는 거 알아?” 연애를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모두가 물었다. 우리의 시작에는 나의 질문과 그의 대답이 있었기에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제는 그가 꿈꿔온 미래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자신의 아이에게 존경받는 삶을 꿈꾼다.
연인에게 나라는 선택은 어떤 끝을 향해가는 시작인 걸까. 나의 세계는 유지될 수 있을까.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더라도 지금의 이 행복이 계속될 수 있을까.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스노우볼 속 꽃가루처럼 머릿속 가득 질문 같은 생각들이 떠다니다 가라앉는다. 바닥에는 꽃가루가 수북하다. 지난밤의 기억이 자꾸만 스노우볼을 흔든다.
시작이라는 두 글자가 끝이라는 한 글자로 수렴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까. 내 두려움의 진짜 얼굴은 무엇일까. 오로지 현재의 내가 되어 생각해본다. 나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그가 없던 과거를 재료 삼아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려 하지 않는 것. 나의 선택은 나의 것이고, 그의 선택은 그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내 눈앞의 그를 바라보는 것.
예언자도 아니면서 막연히 미래를 상상하는 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내 선택이 가져올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어서, 지금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데, 나는 이토록 단순한 세상의 이치조차 거스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