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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내게서 가져간 것

 내 자신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달라진 나와 만날 때가 그렇다. 변화가 시작된 시점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낯선 나와의 만남이 빈번해지면서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 더 이상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커피에 대해서도 그렇다.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그것을 잃고 난 후의 일들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11년 겨울, 문래동 홈플러스 2층의 커피숍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이다.


 내 친구 윤은 문래동에 살았다. 우리는 자주 문래동 홈플러스에서 만났다. 2층에는 푸드코트가 있었다. 한식, 중식, 양식 코너가 한 곳에 모여 있어서 누구와 함께 가더라도 각자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고 적당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양푼 비빔밥, 냉면,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은 기본이고, 돈가스와 새우튀김, 토마토 스파게티가 배처럼 거대한 그릇에 담긴 화려한 비주얼의 가족 세트까지. 도가니 수육이나 족발, 내장탕이나 닭발 같은 음식이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떠올랄만한 웬만한 메뉴들은 다 있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와 커피숍도 있었는데, 모든 음식점과 가게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테이블이 놓여진 중앙의 넓은 식사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해서 늘 먹고 싶은게 많고 뭘 먹을지 변덕이 심한 우리에게 홈플러스 2층 푸드코트는 최소한 실패를 피하게 해 줄 안전한 선택지였다.


 평일 늦은 오후, 한산한 홈플러스 2층에서 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다음 문제였다.(때 되면 오겠지) 나는 푸드코트 커피숍 앞에서 카페 모카를 마실지 말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밝은 미래를 가져다 줄 선택을 하고 싶지만 판단이 쉽지 않았다. 배가 부글거리기까지 몇 분이 걸릴지, 속이 얼마나 쓰릴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화장실로 뛰어가는 상황까지 가진 않을지 모든 감각을 배에 집중하며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를 써본다. ‘...꼭 커피를 마셔야겠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잠깐 배가 아픈 정도라면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몇 분 후, 몇 시간 후 어떤 모습 일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커피를 마시기 전이므로 몸은 어떤 힌트도 줄 수 없다.


 그 해 가을, 김과 헤어졌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여전히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과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쉽게 행복을 느꼈다. 주말이면 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을 이동해 김의 동네로 갔다. 김은 닳아빠진 츄리닝을 입고 양쪽 다 발등과 발바닥을 연결하는 부분이 조금씩은 찢어진 삼선 슬리퍼를 끌고 (계절이 바뀌어도 상의만 바뀌었다. 한겨울에는 패딩을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기름진 머리 위에 하나 뿐인 스냅백을 쓰고 버스 정류장에 마중을 나왔다. 김의 손을 잡고 정류장에서 2분 거리에 있는 피자스쿨에 들러 피자를 사가거나, 동네 마트에 가서 파스타 재료를 사가지고 김의 집으로 갔다. 혹은 바로 집으로 가서 뒹굴거리다가 먹고 싶은 게 생각나면 다시 같은 모습으로 손을 잡고 동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걱정과 불안으로 무거운 머리를 겨우 가누고 살아왔지만 김과 걸을 때면 모든 것을 잊었다. 손가락을 깍지 끼고 길을 걸을 때면 사각기둥처럼 각진 손가락, 도톰하고 너른 손바닥, 부드러운 피부, 적당히 기분 좋은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급히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야 할 때 김은 한 발 앞서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뻗어왔는데, 그 손은 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내 왼손 앞에 있었다.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의 벅찬 행복이었다.


 김과의 연애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9월 23일일지 10월 1일일지, 정확한 날짜를 몰랐을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김은 내가 가게 이름을 말하면 어떤 메뉴를 고를지 알았다. 태극당에서는 감자바게트였고 쁘리앙디즈에서는 오페라 케이크였다. 지갑에 여유가 있고, 기분을 내고 싶은 날에는 삼전초밥에 가서 연어와 장어 초밥을 먹는 것이 우리만의 의식이었다. 김의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쿠앤크 아이스크림과 쿠앤크를 얹어먹을 에이스 크래커를 함께 샀다. G마켓에서 장당 5900원에 산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TV 앞에 앉아 무한도전을 보고, 침대도 없는 김의 작은 방에서 서로를 꼭 껴안고 낮잠을 잤다. 김의 목소리를 칭찬하면 김은 상기된 얼굴로 부끄러워하다가 이내 우쭐해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합을 맞춘 가장 친한 친구였고 파트너였기에 서로의 마음도 몸도 잘 알았다. 그래서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서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김도 나도, 그럴 수 없었다.


 우리는 딱 한 조각이 비어있는 퍼즐이었다. 그 한 조각 때문에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우리의 비극이었다. 등을 붙이고 선 채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몸을 돌려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맞댄 등을 떼고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못 견뎌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함께 있을 때는 행복해지는 것이 너무나 쉬웠다. 맛있는 걸 먹고 서로를 만지고 단잠을 잤다. 김이 찍은 사진을 보며 내가 김과 있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고, 양팔과 양다리를 벌리고 대자로 잠을 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같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봤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았지만 미래가 없는 현재는 남루했다. 우리는 행복한 거지들이었다.


 김과의 연애가 끝나자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김을 빼고 남은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만 그대로 인 채 주변의 모든 것은 다음 촬영을 위한 새로운 세트장으로 바뀐 것 같았다. 나는 “나였던 무언가”가 되었다.


 김 이후 몇 명의 구남친과 한 명의 전남편을 겪으면서 여러 번, 변한 나를 만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회를 좋아하게 되었고, 삼겹살보다 목살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향형 인간이지만 사람들과 있는 시간이 좀 덜 힘들어졌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변하는 동안에도 그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낯선 사람의 손에 익숙한 디자인의 음료 캐리어가 들려있다.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의 것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일곱잔이 낯선 사람의 손에서 내 손으로 전해진다. 어느덧 대표님이 문을 열고 나와 낯선 사람을 맞이한다. “안녕하세요~ 이거 직원분들 드시라구...” 낯선 사람은 대표님 방으로 들어간다. 책상마다 낯선 사람이 사온 아메리카노가 한 잔씩 놓인다. 어쩔 수 없이 내 자리에 놓여진 아메리카노는 몇 시간을 그대로 머물다가, 손님이 가시고 난 뒤 탕비실 싱크대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커피를 마시면 무조건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장 운동이 민감한 시기에는 일주일, 열흘도 배가 꾸룩거리고 장이 꼬인다. 배를 붙잡고 허리를 숙이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점점 더 커피를 마시는 일이 두려워진다. 원치 않았던 내 몫의 커피를 받아들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저 까만 색의 마실거리 한 잔이 뭐라고 만날 때마다 이렇게 두렵고 당황스러운걸까.


 헛된 희망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것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라질 때도 어느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가지 곤란한 점은 그것이 돌아왔는지 확인하려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점이다. 결코 커피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울 뿐이다.  이후에도 나는 또다른 구남친과 삼청동 커피방앗간의 좁은 다락방 자리에 앉아 예가체프를 홀짝이지 않았던가.


  글을 쓰며 깨달았다. 시작은 김이었다. 그것 김이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 김이 그것 가져간 이후로 나는 점점 두려워졌으니까. 아픈 경험이 자꾸만 쌓여서 이제는 커피만 봐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악화되고 말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김이 나에게 다른 것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가 만난 3 동안 함께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범인은 김이다. 10  헤어진 김이 얼마  헤어진 전남편보다  미운  보면, 그만한  잘못을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잃은 건 무엇일까? 아니. 정말 내가 잃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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