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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카츄가 되고 싶어

 침대 위에 깔아놓은 패드에 생리혈이 묻었다. 생리컵을 쓰기 시작한 후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생리가 다 끝났다고 방심했는데... 당했다. 게다가 보통은 물만 묻혀서 비벼도 깨끗해지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2차로 세제를 묻혀 비볐더니 이번엔 세제 자국이 하얗게 남았다. (1)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되겠지 하고는 이불 빨래를 할 여유가 없어 한참을 미뤘다. 갑자기 일주일간의 재택근무가 결정되었을 때, 지금이다 싶었다. 재택근무 둘째 날 아침. 업무 시작 5분 전에 이불 빨래가 끝났다. 후다닥 널어두고 잘 때가 되어서야 마른 이불을 걷어 바로 침대 위에 깔았다.


 세탁기는 얼룩을 없애지 못했다. 꺼낼 때 봤다면 바로 다시 빨았을 텐데. 이불은 이미 뽀송뽀송하게 말라있다. 분하고 원통하다. 일단 좀 눕자.


 사실 그 전에 손으로 조금만 더 비벼 빨았으면 없앨 수 있었다. 다만 귀찮았을 뿐이다. 성한 부분까지 물에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얼룩만 빠는 것이. 세탁기에 넣고 통째로 빨면 얼룩도 자연스레 지워지리라 생각했다. 세탁기를 믿었는데... 당했다. 회색 패드 위 얼룩덜룩한 흰색 세제 자국. 너무 꼴 보기가 싫다. 씩씩거리며 얼룩 옆에 몸을 뉘었다.


 나는 기계를 좋아한다. 걸려오는 전화라고는 각종 스팸, 반품을 수거하러 온 택배기사,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안내, 급하고 잡스러운 일이 생긴 상사(예를 들면 지금 차를 빼야 하는 건물주님에게 상사의 차 열쇠를 전달하는 일)의 전화 등등이 가끔, 세 명의 친구(20년 지기 친구, 친구가 낳은 6살, 4살의 내 친구들)와 동시에 함께 하는 페이스타임이 대부분이지만 스마트폰은 두 대가 있다. 태블릿은 디지털시계로 쓰고 있는 아이패드2를 포함해서 7.9인치부터 12.9인치까지 총 여섯 대, 노트북은 두 대가 있다. 하드디스크를 네 개까지 장착할 수 있는 나스, 전자책 리더기 두 대, 계란 삶는 기계와 전해수기, 자외선 살균기, 닌텐도 스위치, 미싱, 중고나라에 내놓은지 2주가 지났지만 팔리지 않는 수비드 머신까지. 냉장고, 에어컨, 청소기 같은 필수적인 가전을 제외해도 내가 가진 기계의 수는 꽤 많은 편이다.


 집에 불이 나는 상상을 할 때마다 나스와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가장 먼저 챙겨야지 하고 다짐한다. 정말이지 나는 전기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다. 1W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매달 꼬박꼬박 160kW의 전기를 쓰고 있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 수 있는 피카츄로 태어났으면 전기세도 아끼고 환경에도 보탬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다음 생에는 피카츄로 태어나 이 빚을 갚고 싶다.

내 일을 좀 더 쉽게, 좀 더 즐겁게, 좀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주 기계에게 의지한다.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아이패드로 넷플릭스를 켜고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됐을까~?’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가면 출근하기 싫은 마음을 쉽게 모른 척 할 수 있다. 미드를 틀어놓으면 씻기와 영어 공부를 동시에 한다는 느낌도 줄 수 있다. 퇴근 후, 씻기 전에 계란 삶는 기계를 켜놓으면 씻고 나와서 찬물에 식혀 냉장고에 넣기만 하면 된다. 전자책 리더기가 있으면 불을 켜지 않고도 책을 읽다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아낀 시간과 에너지로 넷플릭스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라고 하면 내가 너무 한심해 보이려나.


 기계는 내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부족한 능력이나 자원을 보충해준다. 아이패드 기본 어플인 pages의 템플릿을 사용하면 디자인 감각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깔끔하게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 애플워치가 활동량을 알려주고 격려해주는 덕분에 매일 최소한의 활동량은 채우려고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인다. 지금은 썸남도 연인도 없지만 바이브레이터를 사용하면 아쉬운 대로 버틸 수가 있다. 라고 쓰니까 너무 슬픈 것 같다.


 사람과의 관계도 기계와의 관계처럼 조금 쿨해질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정해진 용도가 있고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나머지는 부족해도 그러려니,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 사람에게는 어렵지만 기계에게는 좀 더 쉽다. 정 만족스럽지 않으면 중고로 팔고 다른 기계를 사면 그만이다. 조금 번거롭고, 약간 손해를 본다는 점은 감수해야 하지만.


 내 삼만구천원짜리 미니 바이브레이터는 사람의 체온이나 피부의 감촉을 느끼게 해줄 수는 없지만, 오로지 배터리의 힘을 빌려 진동하는 것이 그 친구의 역할이므로 나는 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다. 배터리를 끼우고 닦고 정리하는 것도 모두 나의 일이고, 기계는 내가 버튼을 눌러 작동시켰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해내면 그만이다. 아...... 갑자기 기계가 부럽다.


 기계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삶. 내 이마에 액정이 달려서 “배터리 0%. 충전기에 연결해주세요.”라고 배터리 잔량과 충전 안내 메시지를 표시할 수 있다면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힘내라고 말하지 않을 텐데. 대신 조용히 충전기에 연결해주고 배터리가 차오를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둘 텐데. 역시 기계가 부럽다.


 지금은 밤 9시 31분, 남은 배터리는 16%다. 일단 시크한 회색 누빔 패드가 깔린 침대 모양의 무선 충전 패드 위에 이상해를 올려놔야겠다.


 패드에 남은 흰 얼룩은 에너지가 79% 정도 충전되었을 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1. 참고로 패드의 색깔은 회색이다. 시크 그레이를 상상하며 주문했으나 실제로는 템플 그레이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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