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三食)이들의 모임
우리 가족은 주변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유난히 끈끈하다. 딱히 계기가 있는 건 아닌데 어머니가 한평생 전업 주부여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맞벌이 부모님을 둔 친구들은 집에 가면 심심하다며 외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방과 후엔 어머니와 간식을 먹으며 받아쓰기 시험이 어려웠네, 친구랑 어떤 얘기를 나눴네, 급식엔 뭐가 나왔네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게 일상이었다.
시험 성적표가 나올 때 빼곤 화기애애했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가 초등학생 보폭으론 꽤 멀었는데 그날은 왜 이리 집에 빨리 도착하던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지역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방송 일을 하다가 동네 약사가 우리 아들 한번 만나보라며 주선해 주신 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내가 탄생했다. 그 시절 다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결혼과 동시에 전업 주부가 되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엄마가 너무 예뻐서 다른 놈이 눈독 들일까 봐 일을 못하게 했다나 뭐라나. 참나.)
어머니의 친정은 전라도다. 음식 맛이 기가 막히다는 거다. 덕분에 우리는 외식보다 집밥을 더 좋아해서 매 끼니 누구 하나 빠짐없이 식탁으로 모였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코스 요리 정도 먹는 게 아니면 회식 장소보단 집을 택했다. 어머니는 제발 밖에서 좀 먹고 들어오라며 귀찮아 죽겠다 하셨지만 왠지 나는 그게 좋았다.
엄마, 그러길래 좀만 덜 맛있게 만들지 그랬어.
이렇게 우리 집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하나가 된다. 큰 이모는 이런 우리 가족을 보고 바퀴벌레 같은 한 쌍이라느니, 꼴사납다느니 학을 떼지만 표정은 웃겨 죽겠다는 듯이 웃음이 한가득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이모.
서른이 되고 부모님이 50대가 넘으시니 가끔 덜컥 무서울 때가 있다. 앞으로 몇 번의 벚꽃을 보게 되실까 하는 막연한 공포감. 20대 중반이 되면서 본가와 같은 서울이지만 회사와 가까운 지역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떨어져 지내니 오히려 더 애틋해진다. 매일 30분 이상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통화하고 주말이나 연휴엔 웬만하면 함께 지내려고 한다. 예전엔 자주 오지 말고 너나 즐기며 잘 살아라 하셨지만 어느 순간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되려 오라고 하시는 횟수가 는다. 그럴 때마다 나이 드시는 게 느껴져 조금 울적해진다.
막상 본가에 가면 특별히 하는 건 없다. 과일 좀 깎아 먹고 다음 끼니는 뭐해먹을까 고민하는 게 전부인데 그게 그렇게 평온하고 행복하다. 여행을 가도 맛집에 간 게 기억에 남듯이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 먹었던 기억이 오래갈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저녁 식사는 모두 모여 함께 먹은 기억을 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 가장 예우해야 되는 소중한 존재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지켜야 할 선은 짙어진다. 그게 맞다. SNS를 보다 보면 남보다 못한 가족 썰이 보인다. 어쩌다 그 지경이 됐을까 싶다. 안타깝다. 우리 가족이 참 잘 살아왔다는 승리감도 든다.
그렇게 화목하게 지냈어도 아직도 같이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다. 아니, 무병장수를 이뤄도 다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렇게 누구나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라 조금이라도 후회할 건덕지를 남기기 아깝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자.
인생 별거 있나, 그거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