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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 Nov 04. 2024

시작

점심시간이 막 끝난 직후 사무실에서 잠시 딴짓 겸 이 글을 쓴다. 결코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 너무 뭐라 마시라. 정말이다. 원래 하기 싫지만 꼭 해야 되는 일을 앞두면 그 밖의 모든 일들이 하고 싶어 지니까. 퇴근 후엔 죽어도 안 써지던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런 거다.


22년 6월 브런치에서 작가가 되었다는 축하 메일을 받았다. 2번 지원한 끝에 맺은 열매였다. 그땐 당장 책 한 권 낼 기세였는데 벌써 24년이 다 지나도록 제대로 된 글 하나 쓰질 않았다. 아, 참고로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 한 번 들어보시라.


학창 시절부터 매번 교과서 1단원 부분만 너덜거렸던 습성은 아직도 고치질 못(안)했다. 아, 요즘은 교과서가 책이 아니더라. 말세다 말세. 농담이다.


아무튼, 대체로 시작은 창대하나 끝이 미약한 인간 유형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에세이만 써왔는데 매번 글이 흐지부지 됐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쓸 거리가 없어서였다. 소설을 쓸 만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글 쓰는 법을 전공하지도 않은지라 만만한 장르가 에세이라고 생각해서 몇 번을 시도했지만 죄다 접어버렸다.

'에세이 그까짓 거 대충 쓰면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니 '만만한'이란 워딩에 화내지 마시고 조금 더 읽어봐 주십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한 문장이라도 쓸 수 있는 게 에세이뿐이었다. 에세이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글’ 이란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진입 장벽이 낮은가! 어쩐지 요즘 서점에 에세이가 많이 보이더라니. 읽어보면 소소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분명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일상에 공감할만한 속마음들로 가득 차있다. 고등학생 때 모의고사가 망했을 때마다 들여다봤던 공부의 신들의 엄청난 성공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왜 나는 첫 문장부터 쓰기가 어려웠을까.


나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싫었다. ‘싫다’라는 표현 말고 다른 게 없을까 잠깐 고민했는데 그럼 결국 또 나를 표현하는 걸 회피하는 거라 마음을 고쳐먹는다.


바른 생각만 하고 살지도 않고 편견과 불평불만도 많은 사람이다. 비교적 양심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평생 받아온 교육 덕분일 것이다. 세상을 마냥 아름답게 바라보거나 독자에게 위로를 건넬 만큼 인생 짬밥도 안 찼기에 나의 문장에 심지를 세우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어도 뭐든 한 번 쓰기 시작해서 끝을 보고 싶어졌다.


과연 이 생각도 얼마나 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더라. 이 말을 만드신 분, 정말 감사하다. 벌써 반은 했다 치자.

 

이걸 쓴다고 해서 누가 대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사서 고생인 것 같긴 하지만,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신변잡기를 누가 볼까도 싶지만 그냥 해보련다. 나 같은 사람의 일상도 글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느껴보고 싶다.


그러니까 정말 쓸게 없을 때, 하루에 15시간을 잤다는 얘기만 달랑 써놔도 욕하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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