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꽃밭으로 만든 삶에게 감사하며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딸이 공부하며 엄마에게 보내온 편지...
감당할 수 없는 따스함과 포근함, 높은 에너지가 배어나온다.
이 사람은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잠깐 나를 사용한 것 뿐이다.
아내가 보여준 딸의 편지는 엉크러진 모든 근육들 사이의 꼬임을 풀어놓고 찌꺼기가 묻은 뇌를 씻어낸다.
삶에게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호흡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읽게 해 주셔서...
24.08.28 선선해지기 시작한 날.
사람이라는 것은 유한한 존재.
영원을 본따 만들어졌지만 초대의 과오로 인해 '가멸', '필멸'해진 존재.
그러나 인간에게서 영생을 앗아간 이는 자애로워서, 수명 대신 사랑을 주었다.
이로써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슴에 씨앗을 가진다. 제 3자가 심어둔 씨앗을 어떨게 키울지부턴 전부 각자의 몫.
누군가가 유한한 제 육체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동안 누군가는 죽어갈 때까지 자신의 몸에서 나는 꽃향기를 맡지 못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제 몸에 씨앗이 있단 사실조차 망각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이 연약한 씨앗은 하찮고도 비루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저 심어두었다고 새싹을 피우지 않는다.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를 수시로 찾아다니거나
보탬이 되는 거름을 그것의 침대 맨 아래에 깔아두거나
적절한 물을 주어 매 아침 세수를 시켜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성체가 되어 날 반기는...
그런 것이다.
사랑의 형태는 또한 제 각각 달라서
내가 사랑하는 이는
자신과 닮은 '노랑선씀바귀'를 피우고
당신이 사랑하는 나는 '유채꽃'을 피웠다.
당신은 다소 소박해보이는 씀바귀에 대해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척박한 땅 어디에서나 자라며,
해열 효과를 가진 이 흔한 꽃은
내가 이 세상에 없던 시절,
척박한 곳에 뿌리 내리고자 했던 당신과
어린 내가 열이 나면
밤새 물수건을 갈아주고 다리를 주무르던
당신을 떠오르게 한다.
노랑선씀바귀의 꽃말은 '헌신과 순박함',
당신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당신의 염색체를 반쪽이나 물려받은 나는 전혀 다른 과의 꽃을 피웠다.
쾌활, 명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유채는 씀바귀와 피는 곳도 다르고, 식용으로 잘 쓰이지도 않지만 노오란 두 꽃을 보면 어딘가 겹쳐 보이는 것이 나와 당신같다.
그런데 이렇듯 본래부터 내재된 꽃과 달리
살아가면서 피우게 되는 꽃이 있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관계의 주체이자
동시에 상대방에 의해 객체가 되는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새 씨앗을 심는다.
이 꽃의 씨앗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관계의 시작점에서는
그 관계의 결말이 어떠할지 알 수 없다.
인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이 후천적 씨앗들은 꽃 피우기 직전
시들어버릴 수도 있고,
시든 줄 알았던 새싹이 다시 자라나기도 한다.
마침내 씨앗이 자라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은 그 최후의 순간에도 눈을 잠시 뗀 사이 해충이 꼬여 상처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과의 관계는 소홀하면 안된다.
적어도 내가 이 씨앗의 주인을 사랑하고, 그 또한 나를 사랑한다면 상대가 심어준 관계의 씨앗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아껴 줄 일이다.
그대는 나에게 작은 씨앗을 심었다.
잉태된 나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런 당신에 의해
나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정의되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은 씀바귀답게 나를 키웠다.
내가 자라면서
당신이 심은 내 마음속의 씨앗도 같이 자랐다.
그러나 유채꽃이 피어나던 때에도
당신이 준 씨앗은 봉오리가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만발한 유채가 내 마음에 유채꽃밭을 이루어냈던 지난 해에, 그 이름 모를 씨앗이 꽃을 피웠다.
19년 전, 당신이 나에게 심은 꽃은 '보라색 국화'였다.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라는 의미를 담고 피어난 이 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듯하다.
당신은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몰랐겠지만,
나도 당신에게 씨앗을 심었다.
내가 당신을 '엄마'라고 부른 그 어느날에,
울던 내가 당신의 품에 안겨
눈물을 그치던 또 다른 어느 날에
나는 그대에게 씨앗을 심었다.
아직 그 씨앗은 완전히 자라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다음 해가 오면 씨앗이,
그 씨앗이 피운 꽃이
당신의 앞에 피어나리라 믿는다.
나는 그 씨앗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궁금해 할 당신을 위해 속삭여 주겠다.
당신이 내 씨앗의 존재를 잊고 괴로워한다면
옆에서 알려주겠다.
내가 당신에게 심은 꽃은 '은방울 꽃'이다.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
은방울 꽃이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