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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훈 Oct 08. 2024

대환장파티에서...6화(2) 환자에게 강의 그 후...

동네의사의 환자일기


2023년 11월 26일(일) 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기차 안



대환장파티에서...6화(2) 환자에게 강의 그 후...


OOO님)


개인적인 일을 다 들어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저를 응원하고 

제 편이 많아서 이제 발 뻗고 지구별 소풍을 평화로이 할 수 있습니다.


걱정과 응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너무 피곤하실 텐데 잘 도착하셨기를...




환자분이 스스로 지구별 소풍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 놀랍다.



아직 만성통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인데 이런 단어를 쓴다는 것만 해도 큰 발전이다. 


언어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어쩌면 인간은 언어 속에 사는 유일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어가 없으면 생각하기 어렵다. 


개념화가 되질 않으면 생각의 집을 지을 수 없다.

인간에게 언어란 생각의 집을 짓는 벽돌과 같다.



벽돌이 부실하면 집도 부실한 것처럼 부정적인 언어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다.


그러나 만성통증 환자들과 살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인간은 언어가 없다면 정교한 생각을 할 수 없고, 그저 자연적인 동굴이나 나무 그늘 밑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어가 발달하여 문명을 이룬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이면에 수많은 통증이 고통으로 부패하는 과정마다 언어가 작용한다.


<통증은 또 하나의 감정,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법>

https://youtu.be/gB3ePtv6m1k?si=wQorob82Kzo9wxfM


그 전에 '미치겠다', '죽고 싶다'를 연신 내뱉던 환자분의 입에서 '지구별 소풍'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환자분의 언어가 벌써 무의식으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의식적인 영역만 주목해서는 만성통증을 치료할 수 없다. 이렇게 언어를 교정함으로 해서 무의식까지 접근해야 만성통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다행히 OOO님의 옆에는 좋은 분들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극한의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사장님께서 배려를 해 주셔서 치료를 잘 받도록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고 계셨다.


새삼 그 사장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환자분을 잘 치료할 수 있게 이렇게 정성껏 배려하고 계시다니...




나)


참 따뜻한 사장님이시네요.

OOO 님 옆에 참 좋은 분들이 많네요. 


더 건강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구별 소풍하시길 응원할게요.



OOO님)


원장님은 이상하게도 유일하게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셨어요.

상세불명의 병증에 확신을 가져주신 이유가 궁금해요.

의사분들은 신중한 직업이라 책임질 말을 안 하잖아요.


덕분에 첫 번째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상세불명의 병증이라도 치료에 확신을 가진 이유를) 꼭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의사라는 (객관적) 기준은 (따로) 없지만 다른 의사분들과 원장님은 정말 달라요.

사람으로 봐주셔서요. 


따뜻하게 손잡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제가 다 말씀드릴 수 있었어요.

상담받던 곳에선 왜 신고를 안 했는지 제 탓을 했어요.


이제 답 마시고 내일을 위해 푹 쉬세요. 


내일도 행진!! (이때 당시 새로운 병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칭 행진병원이라고 했었다... 지금 최종적으로는 '행복한H병원'이라고 결정되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수준과 다미주 이론


여기서 만성통증이나 트라우마를 다루는 선생님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고통받는 환자에게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생명의 에너지를 뺏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때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된 겁니다.", "이제는 늦어서 방법이 없습니다." 하는 등의 이야기이다.



의료진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설사 그 말이 논리적으로는 적절할지 몰라도 상황을 해결하는 데는 유용하지 않다.


과거의 상황을 돌아보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게 만들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만드는 것은 환자분의 몸에 생리적으로 위협이 되는 신호를 계속 각인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환자의 회복에 유용한가 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의학적인 조언조차 맞는 말은 AI가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의료진은 맞는 말을 환자의 회복에 유용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교감신경계를 자극하고 때로는 파충류 시절부터 발달되어 온 등쪽 미주신경을 자극하여 생명의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데이비드 호킨스의 '놓아버림'에 나오는 감정과 에너지 수준에 대한 도표에 분명히 드러난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자율신경과 다미주 이론을 접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통찰은 놀랍기만 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일반적인 스트레스 반응에서 Flight(도피) 반응이 나오려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등쪽 미주신경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에서는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동작을 하더라도 생명활동을 위한 동작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운 동작을 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의 도표에서 75 이하의 에너지 상태에서는 동작을 하지 않고 멈춰서는 것이 생명체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이때의 행동은 대체로 후회할 만한 선택이거나 되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선택인 경우가 많다.


감정에 대한 뇌과학적인 접근과 자율신경계 반응, 다미주 이론 등을 통찰하면 75 이하는 등쪽 미주신경의 작용, 100에서 175까지는 교감신경계의 부정적 작용, 200에서 400까지는 배쪽 미주신경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교감신경계의 긍정적 활용 단계로 볼 수 있다.


500 이상의 단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없어서 막연하게 추정을 해 보는 정도이다. 이 단계는 아마도 부교감 신경의 확고한 안정화로 교감신경을 자극할 만한 사건에 대해서도 내적인 평화를 유지하거나 꼭 필요한 만큼의 감정 에너지를 써서 '삶'을 온전하게 하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이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매우 약하거나 자아가 무한히 넓은 세계로 확장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내 환자분이 상담을 받던 곳에서는 자신들의 역할을 오해한 것 같다.


사건의 전후를 따져서 책임을 묻는 것은 경찰이 할 역할이다. 


치료하는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의 생리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느끼고 그 심리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데 본인들의 역할을 잘 못 알고 어설픈 충고를 한 것처럼 보인다.



배쪽 미주신경의 역할


만성통증을 치료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다미주 이론(Polyvagal theory)을 바탕으로 이 분과의 상담을 다시 정리해 보자. 


생리적으로 안전한 신호는 몸의 긴장을 이완하고 의료진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한다.


부교감신경 중 배쪽 미주신경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은 다음과 같다.



               고주파수의 부드럽고 운율이 있는 음성 (개인적으로는 내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미주 이론을 공부하면서 내 목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율신경계의 치료에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보다 약간 가늘고 높은 내 목소리가 더 유용하다는 걸 알고 매우 기뻤다.)             


               평온하고 공감하는 미소 (나는 비교적 잘 웃는 편이다 ^^)             


               연민의 눈으로 환자의 눈을 마주 보는 것 (나는 눈이 예쁘다고 자주 칭찬을 들었다^^)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거리 (나는 낯선 사람과 가까이 앉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손을 잡는 등의 편안하고 가벼운 신체 접촉 (내 손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라 차가워진 환자분들의 손을 잡을 때 유리하다^^)             


이 정도면 자율신경치료에 거의 최적화된 신체적, 심리적 상태가 아닌가 싶다. ㅎㅎㅎ



배쪽 미주신경이 정상 작동을 하면 호흡이 편안해지고 심장박동이 안정된다.


그러나 등쪽 미주신경이 작동하게 되면 얼어붙거나 꼼짝도 못 하는 패닉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치 도마뱀이 포식자를 맞닥뜨리면 꼼짝 못 하고 얼어붙거나 사람도 갑작스러운 큰 위협을 받으면 실신을 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인사에서 OOO님의 상냥함이 돋보인다.


내가 피곤할까봐 내 걱정을 하면서 푹 쉬라는 인사... 이것은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음을 뜻한다.


많은 고통이 또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혼자만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환자도, 나도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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