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사의 환자일기
대환장파티에서...7화(2)
천천히 흘러가니까 그동안 못 봤던 게 보여요!
OOO님)
근데 저는 빈번하게 넘어지니까 그게 너무 미안하고 속상하고 스스로 비참했었어요.(과거형)
생각과 몸은 같다면서 왜 따로 노는지 막연히 죽고 싶은 상상과 생각뿐이었어요.쿠팡에서 준비 물품 리스트를 검색하던 날도 있었죠. 운전을 하면 받히고 싶고 신호등 건너는데 빨간 불이 금방 바뀔 때마다 다들 정차해 주는데 스스로 창피하고 너무 외로웠어요. '젊은데 왜 저렇게 걸어?'라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요.
다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거동이 느려지면서 혼자만 생산적인 일을 못하니 무기력했어요. 이제는 천천히 흘러가니까 그동안 못 봤던 게 보이고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뭘 바라보는지?', '어떨 때 행복하고 기쁜지?', '뭘 원하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아직 몸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금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모습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이 순간이 이 환자분께는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 아닐까!
멈추다! 止
수행자들의 첫 깨달음은 대체로 멈추는 데서 온다.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사실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기억은 감정이란 간장에 절여진 장아찌 같아서 감정의 물을 빼기 전에는 원래의 사실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기억이 사실"이라는 믿음은 '나'라는 개념을 지탱하는 낡은 지지대이다.
물론 그 기억은 자신의 고통스런 현재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악화시킬 뿐이지만 멈출 수가 없다.
오래된 습관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기에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OOO님은 창피하고 외로운 감정, 남들로부터 받는 수치심...
사실,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관심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비난하기 보다는 대체로 안타까워 한다. 그러니 수치심이란 남들의 시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주 넘어지면서 이 분은 어쩔 수 없이 행동이 느려지고 비로소 멈추게 되었다.
걸음 뿐 아니라 생각도 멈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이 멈추어지자 남들을 의식하던 시선에서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바라보다! 觀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는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에 어떤 욕구와 바람이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서 결정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땅덩어리는 좁은데 통신망은 워낙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비교하기 쉬운 나라가 되었다.
대동단결이라는 말이 내 젊은 시절에는 아주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인가 각자도생이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의 뇌리에 가득찬 것 같은 느낌이다. 각자 자신의 삶을 모래 알갱이처럼 생각하고 살지만 한편으론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살아간다.
왠지 뒤쳐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대한민국 많은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에너지는 아닐까!
그러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는 것은 삶의 에너지 차원에서는 매우 저급한 에너지이다.
이런 에너지로는 풍성한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설사 큰 재능이 있어서 많은 성취를 한다 하더라도 비교와 불안은 결국은 넘어지고 만다. 성취가 곧 파멸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HOW? (태도)
OOO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라며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한다. 늘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이 내면을 향하게 된 것이다. 때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잠시 정신이 맑아지며 자신의 일생을 짧은 순간에 비쳐보는 말로도 쓰인다. 어쩌면 이 분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진짜 삶을 마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죽음과 삶을 반대편에 두고 생각할 수 있을까! 끝없는 추구와 갈애의 끝은 언제나 고통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막다른 벽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손잡이를 잡아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다.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다. 고통에 시달려온 분들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을 외면하고 편안함을 찾아서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고통은 통증과 달라서 외부에서 오는 자극 그 자체가 아니다.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내면의 불안과 만나 변질된 것이 고통의 실체이다. 통각 수용체에 전달된 자극이 편도체에 알람을 울리고 그 알람이 기억과 만나 전두엽에서 대환장파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대환장파티의 실체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사실 '죽고 싶다!'는 환자의 호소는 '살려 달라!'는 애원이다.
그 애원이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의 성대를 통과하여 입술 주변의 공기에 파동을 일으키는 순간! 정말 죽음의 에너지가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목소리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이전에 자신의 배쪽 미주신경을 억제하고 등쪽 미주신경(식물성 미주신경)을 가동시킨다. 그러면 얼어붙고 무기력해진다. 횡격막 아래의 소화기관들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심하면 심장과 폐의 움직임도 억제한다. 크게 숨을 쉬기 어렵고 심장의 운동이 불규칙해진다. 죽을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을 타고 실제 죽음 쪽으로 몰아가는 현상을 일으킨다.
이제 OOO님은 멈추고 난 뒤 비로소 자신의 실체와 마주한 것이다.
2)WHAT? (대상)
무엇을 바라는지?
이 당시 까지만 해도 이 분은 '미치겠어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때론 '죽고 싶어요.'라는 말을 수시로 했었다. 그런 절망적인 말을 하면서 이 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살고 싶어요. 나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소망의 절망적인 반어법이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의 소망과 반대되는 언어를 선택하고 나면 이제는 그 언어에 나의 뇌가 반응하게 된다. 반어법으로 표현했지만 실상의 세계는 언어에 의해 재창조된다. 이런 반어법의 언어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나의 현실은 언어에 걸맞는 현실이 되고 만다.
머릿속으로는 바다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네비게이션에 '산'을 입력하면 차는 산으로 가게 된다. 생각과 언어가 꼭 그런 관계이다. 그러니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나의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언어가 나의 최종목적지로 인도할테니 말이다.
"나는 풍성한 삶을 살고 싶어요. 나는 불편하더라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볼 거예요."라고 한다면 목적지를 제대로 정한 것이다.
3)WHEN? (타이밍)
어떨 때 행복한지, 누구와 함께 마음이 편안해 지는지, 어떤 상황에서 뿌듯함을 느끼는지, 어떨 때 자유롭고 가볍다는 느낌이 드는지... 등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많은 환자분들이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OOO님이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나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가?
이것은 우리 삶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다. 내가 감정에 휘둘릴 때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감정이 고요해질 때를 기다려 중요한 결정을 해야만 한다. 아직은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이 분이 핵심질문에 다가선 것이다.
이것을 내가 가르치거나 설명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이 분이 핵심을 파악한 것이다.
학회에서 강의를 한 지 벌써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내 강의를 통해 통증을 다루는 400명의 의사선생님들이 자신의 진료실에서도 환자분들과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가 많아지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 분과의 메시지를 정리하는 지금 돌아보니 의사선생님들보다 OOO 님이 내 강의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한 분을 위해서라도 나는 내 강의에 대해서 만족하고 뿌듯하다.
멈추고 바라보기는 수행의 핵심이다.
먼저 깨달은 자 붓다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바르게 바라보는 것(正見)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실, 종교와 관계없이 나는 바르게 바라보는 데서 모든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인들, 특히 만성통증, 자율신경실조증으로 고통받는 분들은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생각과 기억, 자극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바로 보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들은 늘 반복되는 생각과 감정을 철두철미하게 사실이라고 보는 것 같다. 마치 달리는 마차에서 들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아챌 수 없는 것과 같다.
우선은 멈추어야 한다.
OOO님은 미친듯이 질주하는 생각이라는 이름의 말을 멈춰 세웠다.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천천히 들꽃의 색깔과 보드라운 꽃잎의 감촉을 느껴본다.
바깥으로 휘달리던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돌린다.
'참 나'는 어떨 때 행복하고 기쁜지, 뭘 원하는지 바라보는 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